오피니언 노재현의 시시각각

두 ‘장애’의 만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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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어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특별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보통 출판기념회라 하면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다. ‘고희(古稀) 기념 논문집 출판기념회’일 경우 노학자를 중심으로 후학들이 죽 둘러서서 축하를 드리게 마련이다. 하기야 요새는 70세가 희귀한 나이도 아닌 데다 후배 교수들이 논문집에 논문을 내보았자 업적 평가에 반영되지 않아 행사 자체가 없어지다시피 했다고 한다. 정치인들이 출판기념회를 연다면 또 선거철이 다가왔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그런 책들은 거의 자화자찬으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진짜로 본인이 썼는지 의심받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러나 어제 열린 『꿍따리 유랑단』 출판기념회는 조금 특별했다. 책의 저자는 『안내견 탄실이』 등 장애인을 소재로 한 동화를 많이 발표한 고정욱씨다.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1급 지체 장애인이 된 고씨가 같은 1급 장애인인 강원래씨의 체험을 소재로 쓴 소설이 바로 『꿍따리 유랑단』이다. 그러니 출판기념회장이 장애인들의 축제장처럼 변한 것은 당연하다.

지난 월요일에 나는 이 책만큼이나 특별한 공연을 관람했다. 경기도 안양시의 정심여자정보산업학교 강당에서였다. ‘정보’에 ‘산업’까지 들어가 있으니 전문계 고교 이름처럼 보이지만 예전에는 ‘소년원’으로 불렸던 곳이다. 비행을 저지른 10대 소녀 200여 명이 수용돼 있다. 생활관·운동장 등 학생들이 활동하는 공간은 울타리와 자물쇠, 뒷산자락에 둘러친 옹벽으로 외부와 차단돼 있다. 오후 3시에 줄을 지어 강당으로 입장하는 학생들의 표정이나 몸짓은 여느 여중·고생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한때의 잘못으로, 그것도 대개는 근저에 어른들의 더 큰 잘못이 깔려 있는 잘못으로 인해 수용된 아이들이었다. 이 아이들이 강원래씨가 주축이 된 ‘꿍따리 유랑단과 함께하는 신나는 예술여행’ 공연에 1시간50분 동안 열중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무대 위의 장애와 무대 아래 관객의 장애가 만나는 공연이었다. ‘꿍따리 유랑단’은 지난해 장애인들이 모여 만든 공연단체다. 백댄서 등에 비장애인들도 있지만 주역은 어디까지나 장애인이다. 총감독 강원래는 2000년 오토바이를 타다 불법 유턴하던 차량과 충돌해 하반신 마비. 서울예대 출신의 감독 기홍주는 당뇨 합병증으로 인한 시각장애. 한 손만으로 빼어난 마술 솜씨를 선보인 조성진은 마술 공연을 준비하다 화약 폭발 사고로 오른손을 잃고 방황하다 재기한 장애인이다. 한쪽 팔만으로 무에타이 한국 챔피언에 오른 최재식도 무대를 휘저었다. 선천성 청각장애인 김희화가 음악에 맞추어 하도 춤을 잘 추기에 놀랐는데, 나중에 본인이 “진동을 통해 음악을 느끼면서 춘다”고 비결을 말해주었다. 저(低)신장 장애인 나용희는 키가 1m11㎝인데 트로트 노래 솜씨가 프로다. 방송 리포터로도 활약 중인 척추장애인 김지혜는 두 번 떨어진 KBS 성우 시험에 올해도 응시할 계획이란다. 꽃미남 외모로 여학생 관객들의 인기를 한 몸에 모은 오세준은 그룹 ‘티토’의 멤버였지만 더 이상 노래를 할 수 없다는 판정을 받고 한동안 좌절했다. 뇌신경의 이상으로 성대 근육을 조절하지 못하는 연축성 발성장애가 원인이었다.

이날 공연은 문화예술위원회가 복권기금으로 비용 일부를 대는 ‘소외지역을 찾아가는 문화순회사업’ 중 하나였다. “장애인들이니 좀 못 해도 한 수 접고 봐준다는 소릴 듣지 않으려고 엄청 노력한다”고 강원래씨는 말했다. 그런 노력이 무대 아래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출연진이 각자 사연을 고백할 때는 눈물을 짓기도 했다. 강씨는 “내년에는 이 자리에서 만나지 말자”고 학생들에게 당부하며 공연을 마무리했다. 장애인이 신체장애를 극복했듯 학생들도 마음의 장애, 행동의 장애를 이겨내라는 타이름이자 호소였다. 나는 흐뭇하면서도 한편으로 걱정이 들었다. 이곳 울타리 바깥 사회에는 겉보기에는 멀쩡하지만 어떤 장애인보다도 심각한 ‘장애’를 가진 비장애인 어른들이 수두룩하다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