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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인륜 범죄’ 단죄한 뉘른베르크 법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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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1945년 독일을 점령한 연합군은 나치당 전당대회 개최지였던 뉘른베르크에 국제전범 법정을 설치하고 나치의 주요 범죄자들을 법정에 세웠다(사진). 피고인석에 앉은 나치 지도자들 가운데 앞줄 맨 왼쪽 헌병 옆에 앉은 사람이 나치 제2인자이자 공군 총사령관인 헤르만 괴링으로,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사형 집행이 되기 전에 자살했다. 45년 11월 20일에 시작된 재판은 46년 8월 31일 피고인들의 마지막 진술을 끝으로 심리 절차를 마쳤고, 이어 9월 30일과 그 이튿날 속개된 판결문 낭독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역사상 처음으로 ‘반인륜 범죄’를 규정하고 전쟁 책임을 국가가 아닌 개인에게 물음으로써 국제법 발전에 획기적으로 공헌했다. 또한 재판 과정을 통해 나치의 재발을 막는 교육 효과를 거뒀다. 그러나 긍정적 효과만 있었던 건 아니다. 독일인들이 이 재판을 ‘승자의 재판’으로 인식하면서 재판의 긍정적 의미가 축소됐다. 46년 가을이 되자 독일인들은 전범을 오히려 ‘희생양’으로 간주하면서 공개적으로 옹호하기 시작했다.

49년 9월 서독 정부가 공식 출범하자 독일인들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는 전향적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을 새 정부에 촉구했다. 경제 회복에 필요한 경제·행정 부문의 엘리트들이 나치 전력자라는 이유로 배제되고 있는 현실도 압력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50년대는 ‘외부에서 강요한’ 과거 청산이 추동력을 잃고 ‘재(再)나치화’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나치 청산이 퇴색했다. 쫓겨난 수많은 관료·군인들이 복귀했다.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서독의 경제 부흥에는 끈질긴 ‘나치 정신’이 일조했던 셈이다. 서방 연합국이 이를 묵과한 것은 냉전이라는 국제 정세 때문이었다. 과거 청산보다 소련 공산주의의 위협을 막는 게 급했다. 50년대는 ‘나치 때 저지른 죄를 부인하고, 그것을 잊으려는 두 번째 죄를 짓던 시기’였다.

진정한 과거 청산이 시작된 것은 60년대 이후였다. 61년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나치 전범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은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새로운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뭐니 뭐니 해도 세대 교체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민주주의 교육과 인권의식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한 ‘68세대’는 엄격한 도덕성을 주장했고, 앞선 세대의 부당한 행위를 간과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은 근본적으로 독일 시민사회의 성숙에서 비롯됐다. 반듯하게 자란 젊은 세대가 나라의 희망이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