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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선 빚는 오바마 정권의 중남미 외교 정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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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냉전시대에 미국은 군사적 개입을 통해 중남미 대륙의 안보를 담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탈냉전시대에 접어든 이후에는 군사적 안보보다는 인권 침해, 불법 이민, 마약, 돈세탁, 부패, 테러리즘 등을 포괄한 ‘사회적 안보’를 추구해 왔다. 국제사회가 다원화됨에 따라 비(非)군사적인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는 일이 안보 전략 수립 시 주요 요소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최근 콜롬비아에 미군 기지를 설치할 계획이 밝혀지며 미국의 중남미 외교 전략이 혼선을 빚고 있다. 콜롬비아 내 군사 기지의 확보는 마약문제 해결이라는 사회적 안보 차원을 넘어 과거 냉전시대의 군사 안보 차원으로의 회귀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는 오바마 정권이 집권 초기에, 지난 수십 년 동안 중남미 국가들에 지나친 간섭으로 일관해온 미국의 중남미 정책에 선을 긋겠다고 선언한 것과 배치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오바마는 공동의 이익 추구, 가치 공유, 상호 존중을 근간으로 ‘새로운 협력과 동반자 관계’를 열겠다고 약속했었다.

우월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다른 나라를 압박하는 하드파워 중심의 대외정책은 불화와 갈등만 증폭시킬 뿐 결코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바마 정부는 잘 알고 있다. 집권 후 오바마가 중남미에서 사회적 안보를 겨냥한 소프트파워 중심의 스마트 외교를 펼쳐온 건 그래서다. 쿠바와의 경색된 관계를 풀고자 150만 명에 이르는 미국 내 쿠바계 이민자들이 쿠바에 있는 친지를 방문하고 송금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게 대표적이다. 인권의 사각지대였던 쿠바 관타나모 기지 내 테러용의자 수감시설을 1년 안에 폐쇄하라는 행정명령에 서명하기도 했다. 또한 멕시코로부터 미국으로의 마약 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멕시코 정부의 마약 퇴치 운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으며, 콜롬비아 정부의 마약소탕 작전에도 직·간접적으로 금융 지원을 하고 있다. 미국산(産) 무기의 해외 불법 유출을 차단하거나 이민법 개정을 통해 미국 내 불법 이민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콜롬비아 내에 미군 공군 및 해군 기지를 구축한다는 전략을 세움으로써 중남미에 대한 미국의 스마트 외교 정책은 일관성을 잃게 됐다. 미국과 중남미 좌파 정부들 간에 어렵사리 조성된 화해 국면에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것이다. 남미의 강경 좌파 정부들을 미국 정부가 혹독하게 비난하고 나서며 새로운 군사적 갈등의 조짐마저 보인다.

특히 10월 우루과이를 시작으로 향후 1년 내에 볼리비아·칠레·브라질·아르헨티나가 대선을 치르게 되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이들 국가에서 좌파 정치인들이 콜롬비아 군사기지 계획을 빌미로 반미 감정을 자극해 선거에 이용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미군 기지를 마약의 발원지인 콜롬비아에 설치해 마약 거래를 원천봉쇄하겠다는 건 명목상의 이유일 뿐이다. 실제론 베네수엘라·볼리비아 등 강경 좌파 정부들과 근접한 콜롬비아에 방어적 혹은 공격적 전초 기지를 두어 지정학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군사안보 전략이 고려된 것이다. 오바마 정부는 지금 ‘스마트 안보외교’라는 포도주가 숙성도 되기 전에 미리 병마개를 따고 있다. 포도주는 오랜 기간 숙성될수록 가치가 있다는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정경원 한국외대 교수 중남미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