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산부 노숙자 가족살린 이웃사랑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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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서울강남구압구정동 신사전화국 뒷골목에는 생긴 지 10년이 넘는 조그만 포장마차가 하나 있다.

주로 학생이나 젊은이들을 상대로 떡볶이.순대.어묵.튀김 등 간단한 먹을거리를 파는 곳이다.

이 포장마차의 주인이 지난 7일 바뀌었다.

새 주인은 朴정문 (35).洪정화 (22) 씨 부부. 아직은 서투른 솜씨로 떡볶이 판에 고추장을 풀고 어묵국물의 간을 맞추느라 땀을 흘리는 이들 부부는 불과 한달여 전만해도 서울역 등지에서 노숙하던 소위 '일가족 노숙자' 였다.

이들 부부가 노숙생활을 시작한 것은 지난 3월. 남편 朴씨가 종업원으로 일하던 식당이 국제통화기금 (IMF) 사태로 극심한 불황을 겪으면서 실직한 건 지난해말이었다.

실직 이후 朴씨는 공사장 막일을 나가고 거리에서 좌판을 벌이는 등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 한달 15만원의 월세도 밀리기 시작했고 결국 인천의 월셋집을 떠나 4살.2살 난 두 아들과 함께 서울역앞에서 노숙을 시작했다.

불행은 계속됐다.

노숙 생활 한달여 만에 둘째 아들 진영을 잃어버렸다.

반쯤 정신이 나간 두 부부는 "이른 새벽에 50대 남자가 안고 가더라" 는 주변 노숙자들의 말을 듣고 미친듯이 진영을 찾아 나섰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그즈음 부인 洪씨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다.

산모에게 필수적인 충분한 영양보충과 편안한 쉴 곳은커녕 끼니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암담한 절망만이 부부를 짓눌렀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아직 사랑은 남아 있었다.

딱한 처지에 놓인 이 젊은 부부에게 이웃들의 따뜻한 손길이 찾아온 것. 사회복지재단 '사랑의 전화' (회장 沈哲湖) 주선으로 9월19일 마포구공덕동 '신.홍산부인과' 에서 막내 진혁을 순산했고, 지난달 이 단체 소식지 'BI세상사람들' 에 어려운 사정이 소개되자 온정이 줄을 이었다.

모두가 어려운 IMF한파 속에서도 7살 초등학생부터 팔순 노인까지 1백여명이 작지만 소중한 정성들을 보내와 한달 만에 4백여만원이 모였고 서울용산구효창동에 보증금 3백만원.월세 10만원짜리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새로운 생계 터전인 포장마차도 이웃의 사랑 덕이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50대 부부가 "늙고 힘들어 그만둘 참이었다" 며 자신들이 운영해오던 포장마차를 무상으로 양도해준 것.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열심히 일해 저희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그리고 잃어버린 둘째 아들을 꼭 찾아야지요. " 부지런히 손을 놀리는 朴씨 부부의 환한 웃음이 차가운 초겨울의 포장마차 안을 훈훈하게 했다.

최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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