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反정치 재촉하는 정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유럽 국가의 어느 대사는 요즘 한국의 정치를 보고 있으면 자신이 '이상한 나라에 온 앨리스' 같은 착각이 든다고 말했다. 앨리스가 초대받은 티파티에서 참석자들은 앞뒤 안 맞는 의미없는 말을 제멋대로 지껄이고 상대방의 말은 듣지도 않는다. 결론도 없고 합의도 없다. 뜀박질 경기에 출발선도 출발신호도 없다. 뛰고 싶을 때 뛰고 멈추고 싶을 때 멈춘다. 모두가 일등이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거의 매일 요설(饒舌)을 쏟아내는데 하나같이 상대방에 대한 폄훼 일색이다. 말은 저질이고 천박하고 살벌하다. 우리당과 우리 대통령에게 싸움을 걸면 패가망신한다는 표현은 여당 대표보다는 조폭의 세계에 더 어울린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두뇌는 잠재워 놓고 입만 혹사하니 정치인의 격에 맞는 말이 나올 리가 없다.

*** 고구려사는 도둑맞고 있는데…

신약성서의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되는 데 중국의 성서는 이 구절을 '태초에 도가 계시니라'(太初有道)로 번역한다. 말(씀)은 길이요, 도리 (道理)요, 이성 (理性)이다. 그런데 우리 정치인들의 말은 너무 가볍다.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도 정치의 주요 수단인 웅변(oratio)의 요체는 이성을 의미하는 라치오(ratio)라고 강조했다. 그는 웅변없는 영지(英智)는 정치적으로 무력하고, 영지없는 웅변은 무익하다고 점잖게 말했지만 이성을 잃은 요설은 국민에게 고통을 줄 뿐이다.

정치판의 말이 험악해진 것은 총선에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뜨고부터다. 청와대와 우리당은 박근혜 대표에게 유신 이미지 씌우기로 '대선07'의 포문을 열었다. 역사 바로잡기로 박정희를 정치적으로 부관참시하고 그의 딸에게는 연좌죄를 적용하여 유신의 딸, 유신 정권의 퍼스트 레이디로 낙인찍는 대선 전략이다. 그러는 사이에 정작 고구려사는 중국에 도둑맞고 한.일관계의 역사는 일본에 헌납되어 버렸으니 기막힌 희비극이다.

우리가 지금 그렇게 한가한 처지인가. 주한미군의 재배치와 일부 철수로 한국 안보의 틀이 바뀌고 있다. 주한미군이 주일미군의 지휘 아래 들어가면 동북아 안보는 미.일동맹에 좌우된다. 유가는 50달러선 돌파를 위협하고 새 수도 이전 문제는 새로운 지역갈등을 부추긴다. 이라크 파병은 시한폭탄같이 되었다. 대선 때문에 북핵 문제에 유연한 자세를 보인 조지 W 부시가 11월 재선되면 강경 노선으로 선회하여 6자회담이 좌초하고 북한이 핵 보유로 입장을 굳힐 가능성은 크게 남아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대북정책은 어떻게 되는가.

여야 대표가 합의한 상생의 정치는 어디로 갔는가.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야당 대표를 성희롱하는 정치 패러디가 뜨고 국정홍보처 홈페이지에 김일성 조문을 권고하는 글이 실리는 기현상(anomaly)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한국의 뭉칫돈이 로스앤젤레스로 몰려 나가 복덕방들이 호황을 누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당은 그렇다고 하자. 한나라당은 북핵과 새 수도와 경제불황에 왜 확실한 정책 제시없이 청와대와 여당이 걸어오는 말싸움에만 끌려 다니는가.

*** 자고 있는 영령 계속 자게 하라

노무현 대통령과 우리당은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현재를 지배한다는 말을 맹신하는가. 그래서 과거의 망령들을 불러내 라이벌과 비판자들의 기세를 꺾고 장기 집권을 하자는 것인가. 그건 오산이다. 국가권력 차원의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시민사회에 대안정치라는 이름의 반(反)정치가 등장한다. 1980년대 동유럽이 그랬고 민노당의 국회 진출 배경이 그렇지 않은가. 시민단체는 이미 큰 이슈에 대해 상당한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다. 노사모 정권 탄생에 참여한 시민단체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높은 청년실업률을 보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오는 사람들이 정치 부재와 국정 혼란의 가장 큰 희생자들이다.

2007년 대선운동을 앞당기는 것까지 말릴 수는 없다. 그러나 청와대와 정치권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정책으로 싸우라. 자고 있는 영령들은 계속 자게 하라. 천박한 발언으로 국어를 계속 욕보이면 국어국문학회와 초등학교 교사와 학부모들이 촛불 들고 나올지도 모른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