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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1년]3.'은행불사' 사라진 신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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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해말 9개 종합금융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금융권의 대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지난 6월에는 5개 부실은행이 퇴출되면서 가장 친한 친구가 직장을 잃었고 주변에서도 많은 동료와 선배들이 자리를 떠났습니다.

가장 안정된 직장으로 꼽히던 은행은 이제 가장 고용이 불안한 곳이 됐습니다.

나머지 은행들도 합병과 대규모 인원감축의 소용돌이 속에 미래를 가늠하기 어려워졌습니다. "

올해로 은행생활 10년째를 맞는 S은행 金모 (34) 대리는 "지난 1년이 그 전의 9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며 국제통화기금 (IMF) 체제 1년을 돌아봤다.

외환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따지자면 기업들의 무분별한 중복.과잉투자와 그로 인한 한국경제의 총체적 부실을 꼽아야겠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국내 금융기관의 허약한 체질에서 비롯된다.

오랜 관치금융의 폐해가 누적된 금융권 부실로 나타났고 결국 국내 금융 시스템 자체가 신용추락의 파고에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던 것이다.

IMF는 자금지원 대가로 금융권의 구조조정을 가장 먼저 요구했다.

그 후 문을 닫은 금융기관은 5개 은행을 포함, 모두 96개에 이른다.

이제 '은행 불사 (不死)' 의 신화는 깨지고 '은행도 망할 수 있다' 게 상식이 됐다.

금융기관들은 구조조정의 격류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쳤고, 그 과정에서 빚어진 살인적인 고 (高) 금리와 신용경색은 경제 전체를 침체의 늪으로 몰고갔다.

정부와 기업.가계 모두가 금융기관의 부실을 방치해둔 대가를 혹독히 치른 것이다.

◇ 무엇이 달라졌나 = '구조조정' 과 '퇴출' 이란 용어는 이제 일반인에게도 익숙해졌다.

금융기관도 부실해지면 망할 수 있다는 인식의 정착은 IMF체제가 가져온 가장 큰 변화다.

1년전과 비교해 은행권의 지각변동은 가위 혁명적이다.

우선 5개 부실은행이 지난 6월말 전격 퇴출됐고, 상업.한일 등 퇴출을 면한 조건부 승인 7개 은행은 살아남기 위해 가혹한 자구노력을 해야 했다.

자구노력의 결과는 올들어서만 2만여명에 가까운 은행원 정리로 나타났다.

대형 합병이 3건이나 성사된 것도 큰 변화중 하나다.

7월말 상업.한일이 자산규모 1백조원이 넘는 대형은행으로 합병을 선언한데 이어 9월에는 하나.보람은행과 국민.장기신용은행의 합병 발표가 이어졌다. 제2금융권도 구조조정의 칼날을 비켜갈 수 없었다.

고려.동서증권이 인가취소됐고 산업.한남투자증권도 청산절차에 들어갔다.

장은.동방페레그린 증권도 퇴출이 확정됐다.

투신사는 신세기투신에 이어 한남투신이 간판을 내렸다.

또 태양.국제.BYC.고려 등 4개 생보사가 떨려났고, 한국.대한 두 보증보험사는 퇴출을 피하기 위해 합병을 선언해야 했다.

30개사에 이르던 종금사는 모두 16개사가 문을 닫아 남아있는 게 절반도 안된다.

◇ 금융권 판도변화는 계속된다 = 우선 연말까지 은행의 합병.매각이 이어질 전망이다.

조흥은행이 충북.강원은행과의 합병을 눈앞에 두고 있고 서울.제일은행도 연내 매각이 추진되고 있다.

충북.강원은행이 조흥은행과 합치면 3남지방을 제외하곤 지방은행이 모두 없어지는 셈이다.

남은 지방은행들은 합병.증자 등을 통해 또 한차례 살아남기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다.

또 서울.제일은행이 외국은행에 팔려 공격적인 영업을 시작하면 이와 경쟁하기 위해 국내은행들간에 추가합병이 이뤄질 가능성도 크다.

나머지 금융기관들도 엄격해진 감독기준에 따라 앞으로 지속적인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

◇ 남은 과제 뭔가 = 금융권이 환골탈태 (換骨奪胎) 의 큰 변화를 겪었다고는 하지만 금융 구조조정은 여전히 '미완 (未完) 의 과제' 로 남아있다.

지난 9월말까지 21조원의 국민 세금이 금융권 구조조정에 들어갔고 내년까지 모두 64조원을 쏟아부을 예정이다.

예산청은 구조조정용으로 발행한 채권의 이자와 원금중 회수불가능한 돈은 모두 75조원 정도가 될 것으로 추산했다.

결국 국민 1인당 1백70만원을 부실금융기관의 청소비로 부담해야 하는 셈이다.

재정부담도 문제지만 금융권의 잠재부실이 여전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재원부족과 시장충격을 이유로 미뤄둔 보증보험사나 투신사 등이 대표적인 예다.

또 덩치만 키운 은행들의 추가 부실 우려도 여전히 남아있다.

앞으로 기업 구조조정이 본격화할 경우 기업퇴출과 출자전환 등으로 은행권이 떠안아야 할 부담이 적지않기 때문이다.

이정재.김소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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