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제품에 솔솔 부는 복고 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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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을 감고 렌즈를 뗐다 붙였다 하며 사진을 찍는 재미, 다이얼 전화기를 손가락으로 돌리는 느낌, 공책과 스케치북에 필기할 때의 손맛. ‘디지털 세상’이 오기 전의 평범하고 친숙한 감각들이다. 디지털카메라와 휴대전화·노트북 등이 등장하면서 요즘은 맛보기 힘든 추억이 돼 버렸다.

이런 ‘아날로그적 감성’을 도입해 손님을 끌려는 디지털 기기가 늘고 있다. 이른바 ‘디지로그(디지털+아날로그)’ 제품이다. 옛 시절의 손맛과 단순미를 그리워하는 정서에 호소하려는 것이다.

올림푸스가 지난달 출시한 펜 E-P1을 보자. 렌즈를 뗐다 붙이면서 손수 조작하는 수동 필름 카메라의 손맛을 채택했다. 렌즈 어댑터를 활용해 다양한 종류의 렌즈를 달 수 있다. 초점을 손으로 맞춰 촬영하는 수동 기능도 지원한다. 수동 필름 카메라를 연상시키는 외관은 향수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고전적이다.

산요의 풀HD(고화질) 캠코더인 작티 VPC-HD2000도 디지로그 제품이다. 이 회사의 다른 제품에 비해 선이 굵고 투박한 디자인을 채택해 어찌 보면 1970년대 면도기를 연상케 한다. 기본 렌즈 외에 다양한 렌즈를 달 수 있다. 산요코리아의 김지웅 마케팅 부장은 “동영상을 1초에 60컷 찍는 최첨단 사양을 갖췄지만, 아날로그 감성을 더해 호응이 좋다”고 전했다.

중장년층의 어린 시절엔 대부분 도넛 모양의 다이얼이 붙은 기계식 전화를 썼다. 다이얼은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는 일이나 TV채널을 돌리는 데도 쓰였다. 아이리버가 내놓은 휴대용 멀티미디어 플레이어(PMP)는 다이얼과 유사한 느낌의 스핀휠을 채택했다. 휠을 돌려 조작한다. 바로 구식 아날로그 라디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 휠을 돌릴 때의 독특한 느낌과 딸깍거리는 소리는 시각·청각·촉각을 통해 다양한 감성을 자극한다. 그렇다고 피플P35가 아날로그 기능만 있는 건 아니다. 인터넷 풀브라우징 서비스를 제공하고 사용자 PC와 원격 접속할 수 있다.

연필로 공책이나 스케치북에 필기하던 느낌도 아련하다. 컴퓨터나 휴대전화의 자판을 두드려 글씨 쓰는 요즘과 달리 사각사각 연필 소리를 내며 일기를 쓰거나 숙제를 하던 시절의 ‘글씨 쓰기’ 향수는 누구나 갖고 있다. 라이브스크라이브의 ‘펄스 스마트펜’은 아날로그 기술 기반에 디지털 기술을 더한 볼펜 형태의 디지털 제품이다. 스마트펜 아래 쪽에 적외선 카메라가 내장돼 전용 노트 위에 쓰거나 그린 글씨·그림을 인식한다.

MP3 플레이어 시장에도 아날로그 터치 기술이 적용됐다. 삼성전자의 옙 P3에는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듯 화면을 보는 ‘플릭’ 기술이 들어 있다. 만지면 흩어지는 거품 화면으로 아날로그적 감성을 더했다. 또한 24가지 진동 피드백 기능을 갖춰 다양한 진동의 감촉을 즐길 수 있다. 자주 쓰는 기능의 아이콘으로 배경화면을 꾸밀 수 있는 5개의 위젯 화면 역시 플릭 방식으로 편리한 이동이 가능하다. 최근에는 펌웨어 업그레이드를 통해 한 번의 조작만으로 동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아이리버의 유영규 디자인총괄 이사는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제품은 편리하다고 느껴지지만 인간적인 감성과 회귀 욕구만은 충족시킬 수 없다”며 "딱딱하고 메마른 기술 위주의 제품 속에서 사람냄새가 나는 디지털기기를 찾는 배경”이라고 말했다.

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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