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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포럼]여야가 내 손안에 있소이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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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른바 '총풍 (銃風)' 사건과 남북 경제협력, 최장집 (崔章集) 교수에 대한 색깔논쟁 등에 연일 뉴스의 초점이 모이면서 요즘처럼 북한이나 사상문제에 대해 혼란스러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것은 이 사건들이 성격은 약간씩 다르지만 하나같이 우리가 헤쳐 나가야 할 한반도의 숙명적 과제라는 공통점과 함께 서로 어긋나는 점을 동시에 지녔기 때문일 것이다.

꺼져 가는 듯싶던 총풍은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이 검찰간부들에게 배후세력을 밝히라고 요구해 다시 타 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검찰이 전모를 발표하고 기소한 사건에 대해 배후규명을 대통령이 직접 요구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더구나 여야의 치열한 공방 속에 서울지검 공안1부 검사 전원이 법정 연장기간을 모두 써 가며 수사한 사건이 아닌가.

검찰수사의 독립성 확보를 위해 법무부장관도 구체적 사건에 대해서는 검사를 지휘.감독하지 못하도록 돼 있는데 얼마나 답답했으면 대통령이 직접 챙겼을까 싶다.

결과는 지켜볼 일이지만 정작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 것은 이 사건에 대한 북한의 반응이다.

북한 조평통 (祖平統) 이 총풍사건 발표 직후 "만일 우리 (북한) 입이 터질 때면 여든 야든 다 함정에 빠지고 말 것" 이라고 위협하고 나선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의 여야는 모두 내 손 안에 있소이다' 는 식이다.

도대체 정치권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어떤 내연의 관계를 맺었기에 북한이 이처럼 큰소리를 친단 말인가.

북풍이니 총풍이니 하면서 내부의 적을 잡느라 부산을 떨다 외부의 큰 적을 불러 들이는 꼴이나 아닌지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며칠 전 북한을 다녀온 현대 정주영 (鄭周永) 명예회장은 생방송 중계된 기자회견에서 서슴없이 '김정일 (金正日) 장군' 이라고 불러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불러서…" 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나 金에게는 엄연히 노동당총비서와 국방위원장이라는 공식직함이 있다.

공식직함을 놔두고 우상화를 위해 만든 '극존칭' 을 공개적으로 사용한 것은 과공 (過恭) 이 아닐까. 바로 그 이틀전 국회에서는 '북괴' 와 '북한' 의 호칭문제로 여야의원들이 심한 입씨름을 벌였다.

결론이 나지 않자 육군참모총장은 '무력적화통일을 획책하는 북한지배층인 노동당과 정권기관.군사집단은 계속 북괴로 불러야 한다' 고 정의했다.

새삼 지난 74년말 군 복무중의 기억이 떠오른다.

7.4남북공동성명후 화해무드를 타고 '북괴' 라는 호칭을 '북한' 으로 바꾸도록 한 정부의 지침에 따랐다가 날벼락을 맞았던 경험이다.

부대 순시를 온 참모총장이 브리핑을 듣다 말고 "북한이 뭐야 북한이, 북괴지…" 하며 탁자를 걷어차는 바람에 차트작성 책임자였던 필자가 혼비백산했던 것이다.

부대의 담장마다 '때려잡자 김일성' 이라고 써 있던 시절의 얘기다.

시대상황이 달라졌다지만 오늘도 최전방에서 북쪽을 향해 총을 들고 국토방위에 나선 장병들은 '김정일 장군' 이라는 호칭에 꽤나 가슴앓이를 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입을 열면…" 이라는 협박 속에 '북괴' 와 '김정일 장군' 이 공존해야 하는 게 바로 우리 사회의 비극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장집교수사건도 우리를 어지럽게 한다.

언뜻 학문의 자유와 언론 자유의 충돌 같기도 하고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의 갈등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崔교수의 신분이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학자와 공직자는 신분과 성격이 다르고 특히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은 국가 주요정책의 방향을 좌우하는 위치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사상적으로 의심받을 일이 있다면 검증받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물론 문제제기 방법이나 내용.절차에 공감하는 것은 아니다.

또 표적검증이라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지금은 그의 사상에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학문적으로, 객관적으로 입증해 보이는 것이 우선이다.

그래야 다시는 섣부른 사상검증 시비가 나오지 않을 것이고 그가 국가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것을 불안해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햇볕론 때문인지 북한이나 사상관련 문제는 날이 갈수록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대부분 이제껏 교육받아 온 북한에 대한 인식이 쉽게 수정되지 않은 채 그들을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쯤 정부가 대북 (對北) 자세를 한층 명확하게 해 그들이 우리에게 어떤 대상인지를 다시금 일깨워 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권일(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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