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를 김 대통령이라 부른 YS “우린 늘 동지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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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오 국회의장,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 정세균 민주당 대표,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왼쪽부터)가 10일 김대중 전 대통령 문병을 마친 뒤 서울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을 나오고 있다. 이날 병원에는 정치권 인사들의 문병이 줄을 이었다. [김상선 기자·김도훈 인턴기자]

15분이었다. 한국 현대사의 두 거목인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오랜 반목을 털어내는 데 걸린 시간은.

10일 오전 10시5분. 검은색 에쿠스 차량이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차 뒷문이 열리고 YS가 걸어나왔다. 기자들이 에워싸자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곧 이렇게 말했다. “(DJ는) 나하고는 가장 오랫동안 경쟁하면서 동시에 협력해온 사이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특수한 관계다.”

YS는 곧바로 DJ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있는 곳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DJ를 ‘김 대통령’이라고 부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YS=“나와 김대중 대통령은 젊을 때부터 동지 관계였다. 협력도 오랜 기간 했고, 경쟁도 오랜 기간 했다. 둘이 합쳐서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를 이룩하는 데 큰 힘을 보탰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우리나라는 아마 미얀마처럼 됐을 것이다.”

▶이 여사=“직접 방문해 주셔서 감사하다. 대통령이 주무시고 있는데 깨어나서 김영삼 대통령이 다녀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굉장한 위로가 될 것이다.”

▶YS="집사람(손명순 여사)과 함께 오려고 했는데 저만 왔다. 집사람도 안부를 전해 달라고 했다. 병 간호하시느라 수고가 많다.”

▶이 여사="감사하다고 전해 달라.”

YS는 이 여사에게 “모든 세상에 기적이란 게 있으니 최선을 다해 달라”는 위로의 말도 전했다고 한다.

15분 뒤 병원을 떠나는 YS를 다시 기자들이 에워쌌다. YS는 재차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라고 강조했다. 곧 이어 “이번 방문을 DJ와의 화해로 봐도 되느냐”란 질문이 나오자 그는 이같이 답했다. “그렇게 봐도 좋다. 이제 그럴 때도 됐고….”

YS는 최근 지인들에게 DJ의 와병에 대해 “감회가 교차한다”며 “우리가 한국의 민주화·정치에서 제일 큰 역할을 했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DJ도 1990년대 초반 야당 정치인 시절 “내가 죽었을 때 제일 슬피 울 사람이 김영삼 총재고, 김영삼 총재가 돌아가실 때 가장 슬피 울 사람이 이 김대중”이라고 말했었다.

말 그대로 두 사람은 한국 정치를 대표하는 라이벌이었다. 평생 경쟁과 반목을 거듭했다.

87년 대선을 앞두고 두 사람은 갈라섰다. 각각 평화민주당(DJ)과 통일민주당(YS)을 만들었다. 두 사람은 이후 반목을 거듭했고 90년 YS가 3당 합당을 하면서 서로 ‘건널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이후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통령이 됐으나 관계는 개선되지 않았다. YS가 DJ를 향해 “네로 같은 폭군”이라고 부른 일도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부터 경쟁 관계는 아니었다. 박정희·전두환 전 대통령 등 군사정부와 싸우면서 두 사람은 협력자였다. 두 사람을 통해 한국 민주주의가 성장했다. 선의의 경쟁이었다. 두 사람은 68년 야당인 신민당의 원내총무 경선에서 처음 맞붙었고 YS가 이겼다. 70년엔 YS가 40대 기수론을 내걸며 대통령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고 역시 40대였던 DJ도 도전했다. 결과는 DJ의 승리였다. 80년대 중반의 민주화 운동, 87년 직선제 개헌 투쟁에서도 두 사람은 맨 앞에 섰다.

이런 사이이기에 두 사람의 주변에선 “더 늦기 전에 인간적인 화해를 하라”는 권유가 많았었다. 실제 YS도 이날 아침 배드민턴을 치다가 “고비에 있는 거 같다. 언제 가실지 모르니까 가자. 그래도 보는 게 안 좋겠느냐”며 DJ 방문을 결심했다고 한다. 동교동계 좌장 격인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은 “이번 일을 계기로 화해 문제가 해소됐다”며 YS에게 사의를 표했다.

고정애·권호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김도훈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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