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원 간 은밀한 거래 … ‘청부입법’ 판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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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A의원은 올 초 정부 부처가 준비해 온 법안을 자신의 이름으로 제출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법안에 소비자들이 피해를 볼 수도 있는 내용이 포함되는 바람에 빗발치는 항의를 받은 것. A의원은 “정부에서 당초 설명할 때는 없었던 내용”이라며 "나중에 (해당 부처에서) 슬그머니 관련 조항을 끼워 넣었더라”고 털어놨다.

지난 2월 국회 문광위에서는 여야 의원과 정부 인사가 뒤얽혀 한바탕 설전을 벌였다. 한나라당 B의원이 제출한 법안을 두고 민주당 이종걸·전병헌 의원이 “정부가 만든 법안을 의원 이름으로 제출한 게 아니냐”고 출석한 정부 인사에게 추궁하면서 고성이 오갔다.

정부 부처가 마련한 법률안을 국회의원이 발의한 것처럼 ‘세탁’해 국회에 제출하는 ‘청부입법’이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고 있다. 9월 정기국회를 앞두고 또다시 부실한 정부 법안이 의원 발의 법안으로 둔갑해 쏟아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국회 정무위 소속 C 의원은 얼마 전 정부 부처에서 보낸 법률안을 받았다. 의원 이름으로 ‘청부입법’을 해달라는 취지였다. 정부에서는 아예 의원 이름까지 적어 법률안을 만들어왔다. 한 의원 보좌관은 “예전엔 의원실에서 표지에 이름이라도 쓰게 했는데 이젠 아예 공무원들이 의원 이름까지 인쇄해 오는 경우도 흔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정부가 청부입법에 매달리는 데는 통과가 까다로운 법률을 손쉽게 넘기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정부 부처가 법안을 내려면 타 부처 협의를 포함해 6개월∼1년의 기간이 필요하지만 의원 입법으로 하면 1개월 만에 통과도 가능하다. 고려대 장영수(법학) 교수는 “정부가 직접 제출할 수 있는데도 아쉬운 소리를 하면서 의원실로 법안을 들고 오면 법안에 문제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청부입법이 결국 시민 피해로 이어진다는 취지다.

청부입법이 기승을 부리는 데는 의원들 책임도 크다. 자신의 입법 실적을 부풀리기 위해 정부 부처에 “법안을 달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경우가 흔하다. 한 중앙부처 공무원은 “우리 부서에서 마련한 법안 중 의원들이 요구해 넘겨준 사례가 있다”고 털어놨다. 정부는 ‘급행’으로 법률을 통과시키고 의원은 ‘우수 의원’으로 선정되기 위해 야합을 하는 셈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나라당 의원은 “당 정책조정위원회에서 의원들에게 정부 법률을 나눠주기도 한다”고 털어놨다. 국회 입법조사처 보고서에 따르면 17대 국회(2004∼2008년)에서 의원이 제출한 법안은 모두 6387건. 이 중 상당수가 청부입법이라는 게 의원들의 얘기다. 국회 법제실 관계자는 “지난 정부 때 청부입법이 늘었다는 게 대체적인 생각”이라고 말했다.

청부입법이 날로 늘면서 자성의 목소리도 나온다. 지난 4월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한나라당 이정현 의원은 “민생 챙기기보다 정당의 거수기 노릇을 했다”며 청부입법 관행을 반성했다. 같은 당 정태근 의원도 지난 2월 대정부질문 중에 “정부 입법을 편의적으로 의원 입법으로 제출하는 관행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고 공개 발언했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건국대 홍완식(법학) 교수는 “정부 입법이 규제개혁위원회를 거치듯 의원 입법도 규제 심사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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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안·선승혜 기자, 나세웅 인턴기자

◆청부입법=정부가 만든 법률안을 국회의원에게 청탁해 의원 이름으로 제출하는 관행. 차명입법 또는 우회입법이라고도 한다. 정부도 법안 제출권이 있으나 심사가 간편한 의원입법으로 숨겨 처리하는 편법이다. 입법 실적을 올리려 의원이 정부에 법안을 달라고 하는 ‘역 청부입법’도 늘고 있다.

국회 속기록의 청부입법 관련 발언들

▶강창일(민주당) 의원

당신네들 지금 편법 쓰고 있는 것 아닙니까? 국무회의 통과되기 어려우니까 의원님께 부탁해서 가지고 온 거 아니냐 이거예요. (2월 23일, 국토해양위)

▶최병국(한나라당) 의원

정부의 법률안 제출권이 있는데, 각 부처 간에 조정과정도 거쳐야 되고 시일도 부족하니까 슬쩍 만들어 가지고 우리 국회의원들한테 줍니다. (2월 19일, 법제사법위)

▶이석연 법제처장

소위 청부입법에 대해서는 바람직하지도 않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2월 19일, 법제사법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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