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철학에세이' 출간 잇따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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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가을걷이도 끝나가고 한 해의 마무리를 준비할 시점. 월동 동물들은 영양분을 비축하기 시작하고, 나무들도 이파리를 떨어내며 자연의 순환에 동참하고 있다.

정치사상을 전공한 서강대 박호성 교수도 늦가을을 이렇게 맞이했다.

학자로서는 첫번째 '외도' 인 수상록 '인간적인 것과의 재회' 를 냈다 (푸른숲刊) .

3년전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천국과 지옥을 오락가락해 '부활한 예수' 라는 별명이 붙은 그가 학문과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알알이 챙겨 내놓았다.

만추 (晩秋) 의 출판가에 고급 철학에세이가 풍성하다.

인생.진리.예술 등 삶의 구석구석을 곱씹으며 독자들을 사색의 세계로 깊숙이 끌어들이고 있다.

"사상 속에서 삶을 찾고, 생활 속에서 사상을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삶의 여러 애틋한 흔적과 사념의 파편들을 이삭처럼 주워 모았습니다. " 고 말하는 박교수의 '솥냄비 인생론' 이 특히 재치 있게 읽힌다.

서로 섞일 수 없는 물과 불의 힘을 한데 모아 갖은 맛을 내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솥냄비처럼 삶의 참된 힘은 물불을 합치는 '역설' 에서 솟구쳐 나온다고 말한다.

정치.경제.사회 모두 서로 다른 견해나 주장들이 어울리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우리 현주소에 대한 날카로운 일침인 것. 과거 공산권의 '앵무새의 평등' , 현재 자본주의의 '호랑이의 자유' 를 변증법으로 종합한 '호랑이의 평등' 도 희구한다.

사소한 일상부터 거대한 이념까지 아우르며 고난의 시대를 지켜온 한 지식인의 초상이 과장되지 않은 잔잔한 언어로 물결친다.

독일작가 뤼디거 자프란스키의 '인간은 얼마만큼의 진실을 필요로 하는가' 는 제목대로 진실의 문제를 다룬 책. (오석균 옮김.지호刊) . 저자는 무엇보다 '진리' 라는 이름을 앞세우고 인간을 억압한 서양철학의 오류, 혹은 자신의 소신을 진리로 착각하고 타인을 구속해온 정치가의 사례를 통해 인간 개개인에 대한 사랑과 힘을 외치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멍들게 한 전쟁과 착취, 자연파괴 등은 이성과 합리성의 승리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을 가졌던 인간의 독단에서 비롯됐다는 것. 단적인 사례는 히틀러. 니체의 '권력의지' , 쇼펜하우어의 '생에 대한 의지' , 다윈의 '자연선택설' 등을 마구 뒤섞어 자기 민족의 부흥을 꾀했지만 그 결과물은 유대인의 대량학살. 저자는 철학.예술.정치를 넘나들며 이런 결론을 내린다.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해 주는 진리 이외에는 그 어떤 진리도 다른 진리를 압도하거나 억압할 수 없다. "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의 '짧은 글 긴 침묵' 도 가을밤의 친구로 적합하다 (김화영 옮김.현대문학刊) .작가 특유의 철학적 사유를 통해 집.도시.육체.어린이.육체.풍경.죽음 등 세상의 안팎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파리 교외 수도원에 40여년간 독신으로 살며 반추한 삶의 속뜻을 보여주는 것. 산문시에 가까울 정도로 풍부한 이미지로 거북껍질처럼 굳어진 일상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긴다.

"독서는 기적이다. 전율과 웃음과 눈물을 억누를 수 없다" 는 투르니에 말처럼 지금은 독서로 '마음의 추수' 에 나설 계절이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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