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풍경] 말 앞세운 '화씨 9/11' 욕하던 부시와 닮은 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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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영화의 탄생은 다큐멘터리와 함께 시작했다.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의 기차역으로 시커먼 기관차가 들어오는 장면을 찍음으로써 영화는 탄생한다. 이 최초의 영화가 바로 다큐멘터리다. 현존하는 '사실들'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기록하듯' 보여주는 게 다큐멘터리의 출발점이자 매력이다.

다큐멘터리를 표방한 마이클 무어 감독의 '화씨 9/11'은 엄격히 말해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메타 다큐멘터리'쯤 된다. 그가 카메라를 들고 직접 찍은 화면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자료화면들이 이 영화에서 더욱 비중 있게 다뤄졌다.

감독은 자신이 편집한 자료화면들을 관객에게 보여주며 직접 코멘트를 한다. '감상적인' 배경음악까지 동원하며 감독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인 부시 때리기에 집중하고 있는데, 아무리 부시가 밉더라도 사실성과 객관성을 함부로 여긴 듯한 거친 화면들을 여과 없이 보여줘선 곤란하다. 이를테면 2000년 대선에서 당락의 열쇠를 쥐고 있는 플로리다주 선거결과를 방영할 때, 부시 승리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방송사는 플로리다의 어느 방송국인데, 이곳의 보도국장은 부시의 사촌이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간다. 무어에겐 사촌이라는 관계만 확인하면 됐지, 사촌이 무엇을 했는지를 밝히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예단과 논거부족의 면에서 보자면 무어 감독은 아쉽게도 자신이 그렇게 증오하는 부시와 참 닮았다.

다큐멘터리 작가 중에는 무어 감독처럼 잘못된 현실에 남달리 주목하는 정치적인 인물이 많다. 그렇다고 이들이 무어처럼 '감히' 자신의 주장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정치적인 코멘트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다큐멘터리는 기록한 사실을 보여주지, 판단하지 않는다.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좌파 다큐멘터리 작가로 유명한 일본의 오가와 신스케(1935~92), 또 최근 서울에서 회고전이 열렸던 네덜란드의 요리스 이벤스(1898~1989)도 무어 이상으로 정치적이었지만, 섣부른 설교로 관객을 교육하려 들지 않았다. 다큐멘터리는 사실을 기록한 필름 그 자체가 메시지다. 말로 하는 게 아니다.

'화씨 9/11'은 올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부시 때리기로 시작한 영화는 후반부에선 반전의 메시지도 담고 있다. 그러나 반전이 '우리'만 할 수 있고, '저들'은 못한다는 식의 편 가르기로 다뤄져 황금종려상에 걸맞은 넉넉한 평화의 마음을 기대한 관객에겐 적지 않은 실망이다.

한창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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