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준 돈도 못쓰는 지자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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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수해복구와 실업대책 등을 위해 추경예산까지 편성해 일선 현장에 내려보낸 자금 가운데 1조원이나 되는 거금이 아직 집행되지 않은 것으로 예산청의 점검결과 드러났다.

전국 2백48개 지방자치단체중 70%인 1백73개가 자체 추경편성을 통한 자금집행계획을 세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수해복구와 실업대책 등은 화급 (火急) 을 요하는 사안들로, 국제통화기금 (IMF) 체제속의 어려운 나라 살림에 힘겹게 마련해 급한 불을 끄라고 준 돈을 못 쓰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된 것은 지방세수 (稅收) 부족으로 예산이 줄면서 지자체와 지방의회가 투자순위 조정을 놓고 갈등을 빚고 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때문에 올여름 수해가 심했던 경기도 파주와 충북 보은 등의 경우 시설복구비가 한푼도 집행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 8월의 물난리때 여름에 당장 집행돼야 할 수해대책비가 연말에 가서야 주민들에게 도달하는 늑장지원이 올해는 제발 재연되지 않도록 하라고 간곡히 당부한 바 있다.

그러나 올해도 예년의 관행대로 엄동설한에야 수해대책비가 집행되는 한심스런 꼴을 다시 보게 되는 셈이다.

자금의 성격상 집행이 시급한 실업대책비도 공공근로사업은 연말까지 90% 이상 지출될 전망이지만 31만명을 대상으로 한 생계비와 자녀학비 지원은 대상자 선정비율이 불과 58%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마디로 각 지자체의 행정노력이 부족했다는 증거다.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은 지자체나 지방의회 모두가 주민을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라는 점이다.

그런 주민의 재난을 구제하기 위해 어렵사리 마련해 준 돈을 앞에 놓고 싸움질이나 하고 게으름을 피워, 수재와 실업의 고통을 겪고 있는 주민들을 방치하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지 않아도 지자제 실시 이후 공무원들의 태만과 지방의회의 이런저런 잡음이 국가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지자체에 대해 우려하는 세론 (世論) 도 매우 높다.

지방선거때는 주민과의 대화광장을 마련하겠다, 핫라인 전화를 통한 여론수렴을 하겠다는둥 화려한 말잔치를 벌인 단체장들이 귀를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지자체나 지방의회나 지역의 일을 논의하고 처리하는 데 잣대가 다를 수는 없다.

바로 주민을 위한다는 하나의 잣대면 족하고, 그런 잣대라면 쓰라고 준 돈도 못 써 주민들의 고통을 방치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직은 바로 서비스업종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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