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글이 사라질 뻔한 말도 구해, 전설이 이뤄졌어요”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26호 11면

“인다우뻬엘루이소오(사랑합니다).”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주(州) 부퉁섬 바우바우시에 모여 사는 찌아찌아족은 사랑을 고백할 때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연애편지는 쓸 수가 없다. 글자가 없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 국어(로마자)를 이용해 표기를 하지만 완벽한 의사소통이 안 된다. 우리 고유의 언어로 말은 하면서 표기는 한자로 했던 한글 창제 이전의 우리나라와 비슷한 상황이다.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 문자를 얻다

찌아찌아족은 최근 말까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인도네시아어로 표기를 하다 말까지 인도네시아어로 바뀌어 가기 때문이다. 언어 사멸 위기는 찌아찌아족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도네시아는 2만여 개 섬에 2억3000만 명이 모여 사는데 사용되는 언어는 700개가 넘는다. 그러나 언어의 대부분은 찌아찌아족 같이 음성 언어(말)만 있을 뿐 기록언어(문자)가 없다. 그래서 국어인 인도네시아어를 쓰고, 말 자체도 문자를 따라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구 6만 명의 찌아찌아족은 자기들의 말을 지킬 수 있게 됐다. 말을 완벽하게 옮겨 쓸 수 있는 문자를 갖게 돼서다. 그 문자가 바로 ‘한글’이다. 바우바우시는 지난달 21일부터 초등학교(50명)와 고등학교(140명)에서 한국어 교재(바하사 찌아찌아 1)로 찌아찌아어를 한글로 표기하는 교육을 시작했다.

찌아찌아족에게 한글을 수출한 주역은 서울대 언어학과 이호영(46) 교수다. 이 교수는 지난해 5월 인도네시아어가 전공인 동료 교수에게 찌아찌아족의 얘기를 들었다. 사단법인 훈민정음학회 멤버로 ‘한글 세계화 사업’을 벌이고 있는 이 교수는 찌아찌아족에게 한글을 사용토록 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바우바우시를 찾아가 한글 채택을 건의했고 지난해 8월 한글 세계화를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후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7월까지 한국에서 교과서를 만들었다. 이를 위해선 찌아찌아어에 대한 연구가 먼저 이뤄져야 했다. 그래서 영어를 할 수 있는 현지인 교사를 물색했다. 지난해 12월 두 명의 찌아찌아족 영어교사가 한국에 왔다. 그들은 처음 경험하는 추위와 낯선 음식, 향수병 때문에 적응하는 데 굉장히 힘들어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한 명이 포기해 먼저 돌아갔고 나머지 한 명도 돌아가려 했다.

계속 설득하고 정신과 상담까지 받아 겨우 극복했다. 이 교수는 “그때 아비딘(33·교과서 공저자)까지 돌아갔다면 교과서 개발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첫 수업 후 현지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 교수는 “외부에서 온 구원자가 우리 민족에게 좋은 일을 해 줄 것이라는 전설을 믿는 찌아찌아족 사람들이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할 정도로 좋아합니다”고 말했다.

원암재단의 지원을 받아 8개월간 개발한 교과서는 우리말의 쓰기에 해당하는 ‘부리’, 말하기 ‘뽀가우’, 읽기 ‘바짜안’ 세 부분으로 구성됐다. 첫 장을 펼치면 찌아찌아어 발음표가 나온다. 현재 우리는 쓰지 않는 ‘순경음 비읍(ㅸ)’이 포함된 것이 특이하다. 찌아찌아어에 한글 ㅂ과 ㅇ 사이의 소리를 내는 발음이 있는데 이를 표기할 한글이 없어 훈민정음에 있던 문자를 차용한 것이다. 모두 한글로 표기된 이 교과서에는 한국의 토끼전·이솝우화·인도네시아 전래동화와 함께 찌아찌아족의 언어와 문화·부퉁섬의 역사에 관한 글이 실렸다. 특히 찌아찌아족에 관한 설명문은 이 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최초의 문자기록으로서 의미가 있다.

이 교수는 “한글은 하나의 문자가 하나의 소리를 내는 표음문자이기 때문에 어떤 언어라도 표기할 수 있다. 이 점만 보면 영어의 알파벳과 비슷한 조건이다”며 “하지만 한글이 더 유리한 점은 글자 모양만 봐도 소리를 추정하기 쉽다는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한글은 소리가 ㄱ-ㅋ-ㄲ이나 ㅂ-ㅍ-ㅃ으로 퍼져나가 처음 봐도 비슷한 소리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어 원리만 알면 외울 필요가 없다. 반면 알파벳은 G와 K가 비슷한 소리를 내지만 시각적으로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각각의 소리를 외워야 한다는 게 이 교수 설명이다.

이번 사업이 결실을 거둔 데에는 한글의 장점뿐만 아니라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한국에 대해 좋은 이미지가 있는 바우바우시 입장에선 한글로 언어를 표기하다 보면 한국어를 배우기 쉽고 결국 한국과 소통하기 쉬워진다는 계산이 있었다. 또 바우바우시에 한글 마을이 생기면 한국 관광객이 많이 찾는 발리섬에서 한 시간 거리인 이곳까지 관광객이 많이 올 것이란 경제적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이 교수는 “한 민족의 언어가 사라지는 것은 인류의 중요한 유산이 사라지는 것이다”며 “이를 막기 위한 학자로서 사명감이 이번 한글 세계화 사업 성공의 가장 큰 이유이자 원동력”이라고 말했다.이 교수는 한 가지를 걱정했다. 이번에 한글을 문자로 채택한 것은 찌아찌아족뿐인데 오해가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인도네시아 전체가 아니라 소수민족인 찌아찌아족에 국한된 것이고, 표기만 한글로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글을 수출했다고 우리가 정복자처럼 행세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이미 몇 차례 아픈 경험을 했다. 2004년 중국 헤이룽장성의 오르첸족에게 한글을 보급하려다 실패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는 “초반 과열된 분위기 때문에 현지인의 반감을 사 실패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지금까지 한글을 세계에 알리려는 시도는 꾸준히 있었다. 특히 이 교수의 은사이기도 한 이현복(73) 서울대 명예교수는 일종의 한글 발음기호인 ‘국제한글음성문자(IKPA·International Korean Phonetic Alphabet)’를 개발해 한글 세계화에 앞장섰다.

이 교수는 “현지 정부의 견제, 우리 정부의 빈약한 지원에도 지금까지 학자 몇몇이 개별적으로 한글의 세계화 사업을 진행했는데 이번 찌아찌아족 한글 보급사업을 계기로 정부나 학계가 주도해 체계적인 전략을 만들었으면 한다”며 “무엇보다 나라별로 각기 다른 현지 사정을 고려해 적절한 접근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