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지형을 따라 흐르듯 병법도 적의 상황에 맞춰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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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호 09면

『손자병법』을 지은 손무의 초상. 모략의 원칙과 운용에 관한 생각들을 집대성해 병법을 사상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가득 찬 곳에서 빈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병법을 운용하라고 충고한다.

거대한 가짜 성벽이 등장하고, 으리으리한 모형 주택이 들어서는 서양의 오페라 무대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많은 병력이 등장하면서 실제 싸움터의 모습도 꾸며진다. 무대 전체가 실제의 상황을 옮겨놓은 듯한 장치로 가득하다. 백병전과 정면대결을 중시하는 서양의 싸움 전통은 오페라 무대에서도 이렇게 직접적이면서 솔직하게 드러난다.

유광종 기자의 키워드로 읽는 중국 문화-모략5

그러나 중국 전통 오페라 무대는 분위기가 다르다. 배우들의 몇 가지 몸동작으로 거대한 장치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예를 들어 배우가 채찍을 들고 나온 경우, 관중은 그가 말을 탄 상태라는 것을 안다. 노를 갖고 나온다면 그는 이미 배에 올라탄 상태다.

서양과 중국의 오페라 모두 대표적인 대중예술 장르다. 그러나 둘의 양식은 큰 차이를 보인다. 서양은 사실적 묘사에 꽤 큰 공을 들이는 반면, 중국은 과감한 생략과 ‘건너뜀’이 특징이다. 무대장치가 거의 없이 배우의 표정 연기와 대사에 의존해 무대 위의 상황을 만들어 간다.

음악도 다르다. 중국의 민간 악기 연주에는 박자라는 개념이 희박하다. 대신 멜로디가 위주다. 음악의 ‘규격’이 없는 게 특징이다. 정해진 박자에 따라 움직이는 음악이 아니다. 멜로디를 따라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다가 필요한 내용이 있으면 덧붙이고 빼는 것이 가능하다.

6·25 전쟁을 다룬 책을 보면 자주 등장하는 게 중공군의 피리소리다.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로 진입한 중공군의 실제 전력보다 그에 맞선 한국군과 미군의 마음속에 더 큰 공포로 다가온 것은 그들이 밤마다 불어대는 피리소리였다는 게 참전했던 원로 군인들의 한결같은 증언이다.

어디서 언제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방향을 짐작할 수 없어 도처에 적군이 깔려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 참호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한국군과 미군을 향해 어둠 너머에서 날아와 귀를 파고드는 피리소리는 거창하게 적이 정규 병력을 동원해 공격해 오는 것보다 더 심각한 불안감을 심어주는 효과를 거둔 셈이다.

텅 빈 모습의 중국 오페라 무대, 박자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중국 민간 전통음악, 중공군의 피리소리.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뚜렷한 실체를 갖추지 않는 비정형성(非定型性)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이다.

그 비정형성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게 물(水)이다. 그 물에 대한 예찬은 자고로 중국에서 끊임없이 행해져 왔다. 노자(老子)는 가장 큰 가치를 물에서 발견했다. 이른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는 말이다.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남과 다투지 않고, 제 스스로 낮은 자리를 찾아 간다’는 이유 때문이다.

인류의 삶과 함께 시작된 ‘다툼’이라는 행위는 후일 중국에서 병가(兵家)사상으로 정착했다. 그를 집대성한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저자 손무(孫武)의 핵심 사상도 결국 물을 지향하고 있다. 물은 빈 곳을 채운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자연스럽게 땅의 모양새를 따라 흐른다. 항상 낮은 곳을 향하면서도 제 스스로 가득 찼을 때는 다시 그곳을 비운다.

손자는 “병법의 운용을 물과 같이 하라(夫兵形象水)”고 가르쳤다. 그는 또 “물의 성질은 높은 곳을 피하고 아래로 흐른다(水之形, 避高而趨下)”며 “병력의 운용은 가득 찬 데를 피하고 빈 곳을 찌른다(避實而擊虛)”고 했다.

물의 흐름은 지형에 따라 생겨나고, 병력의 운용은 적의 상황에 맞춰야 승리로 이어진다는 게 손자의 결론이다. 가득 찬 곳(實)을 피해 빈 곳(虛)을 공격하자는 제안. 결국 정리하자면 허실(虛實)에 관한 종합적인 계산이다.

허와 실을 서로 대비시켜 물처럼 가득 찬 곳에서 빈 곳으로 흐르게 하자는 내용이 허실론이다. 이는 먼 훗날 “적이 강하면 물러나고, 내가 강하면 가서 적을 친다(敵進我退, 敵退我進)”는 마오쩌둥(毛澤東)의 게릴라 전법으로 이어진다.

요약하자면 『손자병법』의 핵심 사상은 상황에 맞춰 능동적으로 변화를 꾀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른다면 벌판에 횡으로 길게 늘어서 적과 마주보며 전진하면서 총을 쏘면서 진행하는 서양식 싸움은 ‘무식한 방식’에 불과할 것이다.

적의 상황을 철저하게 파악하고 그에 맞춰 병력을 운용하며, 방비가 삼엄하거나 병력이 충실한 곳을 피해 허점을 찌르는 방식. 그래서 중국에서는 ‘병력 운용은 기만을 멈추지 않는다(兵不厭詐)’고 했다.

그래서 언뜻 보면 중국인의 모략은 사술(詐術)에 가깝다. 그러나 그 정도의 기만적인 술책이라면 손자가 병법의 사상가로서 자리매김할 수 없다. 그저 사기꾼에 불과할 수도 있으니까.

그는 사술에 해당하는 게릴라식의 병력 운용 개념인 기(奇)와 함께 병력의 수를 늘리며 물자를 충분히 갖추는 정규병력 개념의 정(正)도 함께 중시했다. 정상적인 전쟁 준비와 함께 순간적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게릴라식 전략을 같은 반열에 병치한 것이다.

중국의 특수한 상황에 따라 도시 노동자 대신 농촌의 농민과 연대해 사회주의 새 중국 건설에 성공한 마오쩌둥(毛澤東), 사회주의 근간을 유지하면서 자본주의 도입에 성공한 덩샤오핑(鄧小平)은 모두 물처럼 상황에 맞춰 스스로를 변화시킨 중국 정치사의 거인이다.

이 둘 다 사회주의 혁명 또는 체제유지라는 ‘정(正)’을 잃지 않으면서 당대의 상황에 맞게 변화의 바람을 접목시키는 기(奇)의 방식을 끌어들여 오늘날의 중국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모략은 물처럼 흐르지만 이렇듯 정과 기가 어울려 묘한 변주를 이룬다. 복잡하면서 오묘한 게 바로 이 모략의 세계다.


중앙일보 국제부·정치부·사회부 기자를 거쳐 2002년부터 5년 동안 베이징 특파원을 역임한 중국통이다. 중앙일보 중국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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