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100일] 주택거래 신고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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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아파트 벽면에 타일 붙이는 일을 하는 김세진(50.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씨는 요즘 일감이 줄어 생계가 막막하다. 지난해 이맘때만 해도 주말도 없이 한 달에 28일 동안 일을 했던 김씨는 지난달엔 고작 5일간만 일을 했다. 김씨는 "한 달 수입이 100만원도 안 된다. 외환위기 때도 요즘만큼은 힘들지 않았다"며 한숨을 쉬었다.

정부가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고 투기를 막기 위해 지난 4월 26일 서울 강남.송파.강동구와 성남시 분당구에 주택거래신고제를 도입한 지 3일로 100일이 지났다.

주무부처인 건설교통부 관계자는"(아파트를 사고팔 때 실거래가로 신고해야 하는) 주택거래신고제 도입 이후 거래가 더욱 줄었지만 아파트 가격은 어느 정도 안정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주택거래신고제 시행 이후 거래만 끊겼을 뿐 실제 집값의 인하 효과는 기대에 못 미친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주거환경연구원 김우진 원장).

애당초 이 제도가 주로 겨냥했던 부유층은 예상과 달리 느긋하다. 집을 세 채 가지고 있는 이모(송파구 잠실동)씨는 "정부 정책이 늘 그랬듯이 좀 떨어지다가 언젠가는 다시 오를 텐데 지금 엄청난 세금을 물고 매매하는 것보다 가만히 있는 게 이득"이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신고제 도입에 따른 부작용은 점점 커지고 있다. 신고지역에서 시작된 부동산 거래 위축 현상은 강북과 수도권 등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신고제가 도입된 후 경기도 분당의 경우 지난해 7월 2284건이던 아파트 거래 건수는 지난 7월에 205건으로 줄었다.

부동산 거래가 끊기면서 당장 이사를 해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도 심하다. 분당 구미동에 24평 아파트 한 채를 갖고 있는 김모씨는 인근 용인 죽전의 32평 새 아파트를 계약한 뒤 살고 있는 집을 시세보다 4000만원 싸게 내놨지만 사겠다는 사람이 없다. 김씨는 새 아파트의 잔금 납부일을 넘기는 바람에 연체금과 기존 아파트 관리비를 이중으로 부담하고 있다.

부동산중개업.이삿짐센터.도배.인테리어.보일러 등 부동산과 관련된 영세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매출감소.소득감소로 생활고까지 겪고 있다.

서울 송파구 대륙공인 임일환 대표는 "전세계약이 일부 있지만 한 달에 4건 정도의 매매계약을 해야 유지가 되는데 5월부터 3개월간 한 건도 못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상가에 있는 H이삿짐센터는 이사 시즌인 여름방학인데도 주말에 하루 20~30여명씩 쓰던 일용직을 2~3명으로 줄였다. 중랑구 면목동의 S이삿짐센터 대표 권모(50)씨는 "일감이 예년의 10% 수준으로 줄어 폐업을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서울 송파구의 A이삿짐센터에서 일당 6만원을 받고 일하던 김모(40)씨는 낮에는 아예 놀고 밤 늦게 건당 2만원에 대리운전 기사로 뛰고 있다. 인테리어업을 하는 이모(48.송파구 신천동)씨는 "주문이 줄면서 제살깎기씩 덤핑 수주도 해야 할 상황이어서 경비 절감을 위해 직원 3명 중 한 명을 내보냈다"고 말했다.

이사 때 가정집 도시가스를 끊거나 연결해주는 업체(서울 강동구 대한도시가스)는 "하루 50건씩 하던 일이 최근에는 20건 정도로 줄었다"고 말했다. 분당에서 인테리어업을 하는 김성웅씨는 "집값 잡기에만 급급한 정부 정책 때문에 서민들만 멍들고 있다"고 말했다.

건설산업연구원 김현아 부연구위원은 "무리한 정책이 실수요자의 거래마저 봉쇄하고, 시장 가격을 왜곡시키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며 "고용 창출 효과가 큰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으면 연관 산업의 줄도산도 피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장세정.서미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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