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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게 내 통장이 개설된다

중앙일보

입력

이코노미스트

A증권 차장 B씨. 그는 고객 관리의 달인으로 불렸다. 그를 전적으로 믿는 고객이 많았다. 적지 않은 고객이 신분증을 선뜻 맡기고 통장 비밀번호까지 가르쳐줬다.

그런 B씨가 고객의 뒤통수를 때릴지 누구도 몰랐다. 2007년 12월 그는 고객 계좌에 손을 댔다. 신분증과 통장 비밀번호를 이용해 고객 통장을 추가 개설한 뒤 돈을 빼돌렸던 것.

이른바 ‘쌍둥이 통장’을 만들어 고객 돈을 횡령했다는 얘기다. 적발 가능성은 치밀하게 차단했다. 금융사고에 대한 불안감이 커지면서 대부분의 고객은 문자메시지로 입·출금 내역 통지를 받는다.

휴대전화로 통장 거래 내역을 알려주는 이 서비스는 모든 금융회사에서 제공한다. 그러나 고객정보를 꿰고 있는 B씨로선 거리낄 게 없었다. 메시지 수신처를 자신의 휴대전화로 바꿔놨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많은 돈을 빼돌려도 입출금 확인 내역은 고객이 아닌 B씨에게 전달된 셈이다. 이런 수법으로 B씨가 1년3개월 동안 빼돌린 고객 돈은 3억여원. 검찰에 덜미를 잡히지 않았다면 피해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올해 6월 구속된 B씨는 7월 23일 사문서 위조 및 행사에 대해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내 통장이 나도 모르게 개설된다? 어렵지 않은 일이다. 쌍둥이 통장은 고객 정보만 있으면 손쉽게 만들 수 있다. 이 통장만 있으면 고객 돈 빼돌리는 것도 식은 죽 먹기다. 이체 버튼 하나면 모든 게 끝이다. 걸릴 위험도 적다. 겉으론 고객 통장에서 또 다른 고객 통장으로 돈이 넘어가는 모양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B씨처럼 입출금 확인내역 수신처만 살짝 바꾸면 고객으로선 마른 하늘에 날벼락 맞기 십상이다. 이런 금융 사고는 비일비재하다. 2005년엔 창구직원으로부터 고객정보를 넘겨받은 C씨가 고객 통장을 새로 개설해 20억원을 빼돌린 일도 있었다. 더구나 금융비리가 날로 지능적이어서 적발을 피하고 있다.

기존엔 직원 통장으로 입금된 고객 예치금을 횡령하는 사고가 빈번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새마을금고 지점장의 ‘로또 촌극’이 대표적이다. 이 지점장은 고객 예치금 87억원을 자신의 계좌에 입금한 뒤 복권을 구입했다가 꼬리를 잡혔다. 하지만 최근엔 고객 통장을 불법 개설하고 이를 창구로 돈을 빼돌리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문제는 금융사고의 영역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중은행에 국한됐던 횡령사고가 증권사·투신사·보험사로 넓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A증권 B씨 사례처럼 말이다. 금융감독원의 금융사고 실태현황 자료를 보면 올 상반기 167억원의 횡령사고가 있었는데, 모두 증권·투신사에서 발생했다.

경기 회복을 기대한 시중의 뭉칫돈이 증권사 등에 몰리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금융권 관계자는 “고객 돈을 유용·횡령하는 사고를 막기 위해 은행만큼이나 많은 고객 돈을 취급하는 증권·투신사도 내부 통제시스템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참에 명령 휴가제를 효율적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명령 휴가제는 직원에게 불시 휴가를 주고 그동안 다른 직원이 업무내용을 점검하는 시스템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객 스스로 자신의 정보를 꼼꼼하게 관리하는 노력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지점에 있다 보면 신분증은 물론 보안카드까지 맡기는 고객이 있다”며 “이런 부주의한 행동을 자제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했다. 고양이에게 무심코 생선을 맡겼다간 낭패를 당할 수 있다는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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