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고 공감하고 … 건축은 그 선물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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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2007년 영화배우 원빈이 건축가 곽희수(42·이뎀도시건축 대표)씨를 찾아왔다. 고향인 강원도 정선에 집을 짓고 싶다며 원빈이 내민 건 미국 팝스타 제니퍼 로페즈의 집 사진이었다. 그러면서 농사를 짓는 노부모가 머물 방엔 불을 땔 수 있는 아궁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곽 소장은 “어려운 방정식 문제를 받아든 기분이었지만 연로하신 부모님에게 새 집의 편리함을 강요하지 않고 아랫목의 온기를 간직하게 해드리고 싶은 아들의 마음이 먼저 다가왔다”고 돌아봤다. 이 방정식을 그는 어떻게 풀었을까. 42번 국도변에 지어져 ‘42번 루트하우스’란 이름을 얻은 이 집은 ‘2008 건축문화대상’ 일반주거부문 본상을 받으며 유명해졌다.

42번 국도변에 세워진 영화배우 원빈의 집. 잔디 마당을 지붕으로 끌어올려 3층으로 이어지는 언덕길로 조성했다. 곽희수 소장은 “수려한 주변 풍광을 집 안으로 들여오기 위한 건축적 장치”라고 말했다. [이뎀도시건축 제공]

◆언덕을 집 안으로 들여오다=‘루트하우스’의 가장 큰 특징은 집안 중심에 조성한 ‘푸른 언덕’이다. 부모가 기거하는 1층 가운데 마당(중정)에서 원빈이 쉴 때 머물 3층 별채 발코니까지 이 비스듬한 언덕이 이어진다. 1층 지붕이 곧 잔디 깔린 마당인 동시에 아들 방으로 가는 길이 된 셈이다.

“이 집은 2층이 없이 바로 3층으로 이어집니다. 전통 한옥에서 수평적으로 배분되는 별채 개념을 수직적으로 풀어본 거죠.” 전통의 개념을 단순한 집의 ‘형식’이 아닌 ‘삶의 공간 구분’으로 해석했단다. 노부모가 쓸 1층 부엌은 벽돌로 장식하고 불을 때서 난방을 할 수 있는 아궁이 보일러를 설치했다. “한 면은 도로로, 또 다른 면은 농경지로 향한 집의 전경(全景)이 이 집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국도변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데도 토속음식점·모텔·주유소 등 ‘기능’만 살린 토목구조물이 많아 늘 아쉬웠거든요. 이 집이 국도변에 즐거운 풍경으로 녹아들길 바랬죠.”

◆‘현상’에 주목하다=곽 소장은 도시 현상에 관심이 많다. ‘고소영 빌딩’으로 이름난 서울 청담동 ‘테티스’(서울시건축상·2008 건축문화대상 일반건축부분 우수상)를 설계하며 강남의 주차난을 연구했다. ‘신승훈 건물’을 짓기 전엔 ‘버려진 옥상’을 떠올렸다. “어떻게 하면 주차 문제도 해결하고 자동차가 차지한 1층 공간을 살려낼까 고민하면서 테티스 설계를 시작했어요.”

‘테티스’는 꽤 복잡한 구조를 하고 있다. 계단으로 반층 높이가 올려져 넓은 테라스까지 갖춘 1층, 그 아래에 숨겨놓은 지하 주차장, 계단과 마당까지 있어 ‘지하 같지않은’ 지하 2층, 마루 데크로 된 5층 옥상까지 특이한 공간이 많다. ‘비상구’ 개념으로 방치되기 일쑤인 계단이 여기선 넓고 밝게 설치됐다. 계단을 각 층의 가치를 최대한 높이는 도구로 썼다는 것이 곽 소장의 설명이다. 넓은 계단을 배치해 1층에서 소외된 2층에 아래층의 연장선상이라는 느낌을 준 것이다. ‘실용적’ 계산으로 만들어진 계단은 건물에 미학적 가치를 보태 이곳에 임대해 있는 사진 스튜디오의 ‘세트’ 역할까지 톡톡히 하고 있다.

◆”난 공감하는 현실주의자”=곽 소장은 “나는 실용주의자, 현실주의자”라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건축가는 ‘건축주의 마음을 읽는 마인드 리더’이자 ‘건축주의 꿈에 목소리를 입히는 변사’다. 또 건축의 공공적 가치를 조율하는 ‘도시중개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건축가의 센서가 반응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편집증적으로 계단과 지붕, 옥상까지 공간의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디테일의 ‘용도’를 따지는 작업방식이 모두 건축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곽 소장은 홍익대 건축학과·국민대테크노디자인대학원 출신. 2001년 처녀작에 매달린 그를 눈여겨본 한 사진가의 추천으로 신승훈 건물(도로시뮤직·2003)설계를 맡으면서 연예인 건축주를 잇달아 만나는 행운을 따냈다. 그는 “건축가와 건축주는 끊임없이 대화하고 충돌하는 관계”라며 “설득하거나 가르치려드는 것보다 더 힘이 센 것은 공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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