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조직이라야 창의적 발상 샘 솟는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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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사정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 살얼음판을 걷는 형국이다. 경기가 확연히 회복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아직 비상체제”라며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을 정도다. 이런 시기에 기업 경영을 책임진 최고경영자(CEO)들은 노심초사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남다른 지혜와 철학으로 위기에 대응하며 위기 이후를 대비하는 CEO들도 있다. 중앙SUNDAY는 글로벌 경제위기의 시대에 국내 대표 CEO들의 지혜를 듣기 위한 ‘릴레이 인터뷰’를 마련했다. 첫 순서로 대한상공회의소와 CJ그룹을 이끌고 있는 손경식(70) 회장을 만났다. 손 회장과 인터뷰는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남대문로 대한상의 회장 접견실에서 1시간30분가량 이뤄졌다.

-글로벌 경제위기로 많은 기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럴 때 CEO는 무엇에 가장 신경 써야 하나.
“기본적으로 닥쳐오는 위기에 잘 대처해야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경제 패러다임이 빠른 속도로 바뀌어 가고 있다. 종전 방식에 안주하면 언젠가 2류로 떨어진다. 새로운 아이디어로 남이 생각하지 못한 사업과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창의력이다. 창의적인 조직을 만드는 게 급선무다.”

손 회장이 이재현 회장과 공동 경영하는 CJ그룹은 재계 순위 19위로, 식품을 주력으로 유통·생명공학·미디어·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이재현 회장은 고(故) 이병철 삼성 회장의 장손이다. CJ의 모태는 1953년 설탕 생산업체로 설립한 제일제당으로, 93년 삼성그룹에서 분리됐다. 2002년엔 회사 명칭을 설탕·조미료 등을 연상시키는 ‘제일제당’ 대신 영문 약자인 ‘CJ’로 바꿨다. 지난해 말 총자산은 12조3240억원에 달한다.

-CJ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창의적 조직 문화가 창의적 아이디어를 만든다. 분위기가 딱딱하면 좋은 아이디어를 내기가 쉽지 않다. 이재현 회장이 창의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데 매우 적극적이다. 복장도 자율화하고 출퇴근 시간도 융통성을 두고 있다. 조직도 부장·차장·과장 직급 체제가 아닌 기능 중심으로 개편했다.”

손 회장은 인터뷰 중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창의’를 강조했다. “경쟁력의 요체는 창의력”이란 설명이었다. “한국 경제 전체로도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기 위해선 창의성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CJ는 식품 기업 이미지가 강하다. 새 사업 발굴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나.
“더뎌 보여도 착실히 한 발, 두 발 나아가고 있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많이 바뀌었다. 우선 홈쇼핑이란 새로운 영역에 진출했다. 중국에서 두 개의 합작 홈쇼핑 방송을 만들었고, 다른 나라에도 넓혀 가려 한다. 미디어 산업에도 진출했고, 물류·게임사업도 하고 있다. 식품 외에 사업 다각화를 많이 했고 (비식품 부문의) 비중도 커졌다.”

-기업 인수합병(M&A)을 할 때 원칙이 있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가치평가(valuation)다. 가격 결정에 매우 신중해야 한다. 너무 비싼 값을 주면 자금 조달도 어렵고, 수익성을 맞추기도 힘들다. 그동안 (경영권) 프리미엄이 너무 비싸지 않았나 생각한다. M&A를 하려는 목적도 분명해야 한다. 해당 사업에 진출할 필요가 있는지, 원하는 시너지(상승 효과)와 기술을 얻을 수 있는지 확실히 따져봐야 한다.”

CJ는 현재 계열사인 CJ오쇼핑을 통해 케이블·위성방송 사업자인 온미디어의 인수를 추진 중이다. 그러나 가격이 문제가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외환위기 땐 ‘현금 중시’ 경영
-32년째 CEO를 맡아 오고 있다. 가장 어려웠던 때는 언제이며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나.
“1998년 외환위기 때다. 지나치게 걱정하는 바람에 너무 세게 구조조정을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던 것 같다. 당시 철저한 현금 중시 경영을 했다. 그렇지만 위기가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위기 이후 사업 전개에 대해서도 준비를 했다.”

CJ는 연간 10억 달러 규모의 곡물 수입을 하는데 외환위기 당시 대외신인도 하락으로 곡물 수입이 사실상 막히는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고금리와 고환율로 어려움이 가중되자 손 회장은 ‘현금 중시 경영’으로 위기를 헤쳐 나갔다. 덕분에 위기 이후에는 넉넉한 현금으로 공격적 투자와 M&A에 나설 수 있었다. 2000년 삼구쇼핑(현 CJ오쇼핑)을 사들인 것을 비롯해 삼양유지사료(2002년)·신동방(2004년)·해찬들(2005년)·하선정종합식품(2006년) 등을 인수했다. 그러면서 생수·음료사업과 드림라인을 매각했고, 지난해는 CJ투자증권을 현대미포조선에 넘겼다.

-쌍용자동차가 심각한 노사 분규를 겪고 있다. 노사 관계 안정을 위한 CEO의 역할은 무엇인가.
“CEO는 투명한 경영을 하고, 근로자들에게 긍정적 인식을 심어 줘야 한다. 경영 내용에 대해서도 가급적 공유하는 게 좋다. 동시에 ‘무노동 무임금’ 같은 원칙에선 물러섬이 없어야 한다. CJ는 사원들과 어떠한 문제도 토론할 수 있도록 대화의 광장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현 정부가 노사 분규에 대해 엄정하게 법을 집행하려는 것은 매우 잘하는 일이다.”

-현 정부는 ‘비즈니스 프렌들리(Business Friendly·친기업)’를 표방하고 있다. 대한상의 회장으로서 점수를 매긴다면.
“수치로 얘기하긴 어렵다. 현 정부가 들어선 지 아직 2년이 되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평가해야 한다. 글로벌 경제위기로 세계 여러 나라가 어려움을 겪는데 우리는 상대적으로 괜찮다고 한다. 그것 자체가 큰 성과라고 본다.”

-정부나 정치권에선 기업들이 투자에 너무 소극적이라는 불만이 있는 듯한데.
“기업이 투자를 하지 않는 게 아니다. 올 들어 투자 분위기가 호전됐다.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하는 대기업도 많다. 대기업의 투자 분위기가 성숙하면 중소기업으로 확산될 것으로 기대한다. 투자는 기업이 사업 전망이 서야 할 수 있는 것이다. 투자는 항상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것인데 투자 의욕을 높여 주는 지원도 있어야 한다. 세제 측면에서 좀 더 과감한 접근이 필요하다. 예컨대 임시투자세액공제제도가 올해 말로 종료되는데 이런 제도는 연장해 줘야 한다. 법인세 인하는 예정대로 시행하고,
상속세 인하를 통한 기업인의 투자 의욕 고취도 필요하다.”

-정치권에 대해 재계가 불만도 있지 않나.
“국회가 민생 법안을 잘 처리해 주길 바라는 것은 모든 국민이 염원하는 바다. 희망을 갖고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생 법안 중 가장 시급히 처리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비정규직법이다. 7월 1일부터 비정규직 고용 기간이 2년으로 제한되면서 자꾸 해고가 발생한다. 기업으로서도 안타깝고 당사자도 직장을 잃어 딱한 일이다.”

-야당이나 노동계에선 비정규직법에 따라 정규직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신중히 살펴봐야겠으나 현재까지 노동부 조사에선 대상자의 70% 정도가 해고됐다고 한다. 대한상의에서 법 시행 전에 기업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했던 결과도 비슷한 수치가 나온 바 있다.”

-청년실업도 심각하다. 기업들이 고용을 기피하고 있지 않나.
“올 상반기에 기업들이 ‘일자리 나누기’ 운동을 펼치는 등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래도 없는 일자리를 억지로 만들 순 없다. 산업 경쟁력이 약화돼 바람직하지 않다. 세계 시장에서 우리가 뻗어 나가려면 산업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 산업 구조면에서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산업 비중이 높아져야 한다.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게 서비스 산업이다.”

-서비스업의 대표적 분야가 유통인데 최근 기업형 수퍼마켓(SSM) 때문에 논란이 일고 있다.
“상반된 측면이 있다. 국민 생활 편의 측면에선 필요하다. 그러나 지역 소매상들의 어려움도 간과할 수 없다. 서로 조정하려고 노력할 책임이 있다.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라 일본도 경험했던 문제다.”

‘4대 강 사업’ 지역 경제에 큰 도움
-막상 투자하려 해도 각종 규제 때문에 힘들다는 말도 많이 나온다.
“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규제 완화 노력을 많이 했다. 그런데 현장에서는 와 닿지 않는다. 이유가 있다. 규제를 풀기로 결정은 해 놓고도 법령 정비에 시간이 걸려서다. 시행령은 정부가 고칠 수 있지만 법 개정은 국회를 통과해야 한다. 지방자치단체 조례로 묶인 것은 시간이 더 걸린다. 몇 개 부처가 관계되는 것은 부처 간 실무협의가 늦어지는 경우도 있다.”

-규제 때문에 투자를 못 하는 문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나.
“공장을 지을 때 입지 규제가 심해 허가가 잘 나오지 않는다. 쌀이 남아도는데 농업 지역을 엄격하게 묶을 필요가 있나. 이런 데 공장을 지을 수 있게 풀어 달라는 것이다. 산림 지역도 비슷한 이유다. 오염 산업이라며 규제하는 것도 있는데 요즘은 기계설비가 좋아져 예전처럼 오염물질이 많이 나오지 않는다. 또 공장 주차장을 넓게 확보하라고 하는데 불필요하게 땅만 차지하는 경우도 많다.”

-현 정부가 주창하는 ‘녹색성장’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
“정부가 앞장서지 않더라도 차세대 성장동력으로서 녹색산업은 중요하다. 얼마 전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가 대한상의 행사에 왔다. 그분도 녹색성장을 강조하더라. 정부에서 녹색성장에 많은 투자를 하겠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거냐 하는 아이디어는 부족하다. 앞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녹색성장의 하나로 4대 강 사업을 추진하지 않나.
“4대 강도 넓은 의미에선 ‘녹색성장’이긴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필요한 사업이다. 4대 강이 말라가고 아파하니 살려야 한다. 4대 강이 지나가는 주변 지역은 대체로 경제가 어렵기 때문에 혜택도 많다. 지역 경제 활성화에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일자리도 창출하고, 수로도 유용하게 활용하고, 환경에도 좋다. 구미에서 부산까지 화물을 실어 내려가면 좋지 않겠나.”

-대한상의와 CJ그룹 일을 동시에 하려면 바쁘지 않나.
“대한상의 일이 더 많다. 시간적으로 6대 4나 7대 3 정도 된다. 대한상의는 행사가 많다. CJ는 중요한 의사 결정에 중점을 두고 있고, 일상 업무는 하지 못한다.”

-고희의 나이에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건강 관리의 비결은.
“의사가 체중을 줄이라고 해서 73㎏에서 68.5㎏으로 줄였다. 한두 달 사이에 4㎏ 이상 뺀 것이다. 식사를 조절하고, 운동을 빼먹지 않고 한다. 체육관에서 자전거를 탄다. 한 번 운동에 170㎈를 소비하는데 시간이 37~38분 걸린다.”

손 회장, 이희자 루펜리 사장 추천
-다음 ‘릴레이 인터뷰’ CEO를 추천해 달라.
“루펜리의 이희자 사장이 좋을 것 같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음식물쓰레기 처리기를 만들어 시장에서 성공한 기업인이다. 지난달 초 이명박 대통령이 폴란드에 국빈 방문을 했을 때 KOTRA가 현지에서 한국 제품 전시회를 열었는데 거기에도 루펜리 제품이 소개됐다. 당시 이 대통령이 관심을 보여 내가 직접 제품에 대해 설명해 드렸다.”

손 회장은 즉석에서 전화를 걸어 이 사장과 대화하며 중앙SUNDAY와 인터뷰를 정중히 요청했다. 통화가 끝나자 손 회장은 “요즘은 여성이 벤처기업을 많이 하는데 참 좋은 일이다. 여성의 능력을 충분히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진용·주정완 기자 jw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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