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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두려워 말고 '어학 훈련 홍수'에 풍덩 빠져야"

중앙일보

입력

여소영 외교통상부 1등 서기관은 "한국인이 중국어를 배우면 다른 어느 나라 사람보다 유리하다"고 강조했다. [신동연 기자 ]

여소영(34) 외교통상부 북핵협상과 1등서기관은 명실공히 한국의 중국어 공신(工神)을 대표할 만한 사람이다. 단순히 말을 유창하게 잘한다는 선을 넘어 상대방의 의중까지 파악해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여 서기관은 1995년 5월부터 2004년 2월까지 대통령 통역으로 일했다. 한·중 수교(92년) 이후 본격적인 교류가 이뤄진 시기였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과 고 노무현 대통령이 장쩌민·후진타오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할 때마다 통역을 맡았다. 총리 회담을 비롯해 고위급 회담 통역도 전담했다. 원자바오 총리는 여 서기관을 "전 세계 중국어 통역 가운데 제일 잘한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그의 중국어 학습 비법은 무엇일까.
"아주 어렸을 때부터 책을 너무 좋아했어요. 그런 저를 부모님은 6살 때 조기 입학을 시키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결국 7살 때 화교학교에 들어갔죠."중국에 관심이 많았던 아버지는 평소 "앞으로는 계란장사를 하더라도 중국에 가서 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일찌감치 중국의 부상을 내다봤다.

화교학교에선 무조건 따라 읽고 쓰기를 반복해 나중엔 중국어 교과서를 외우다시피 하도록 했다. 2학년부터는 당시(唐詩)·송사(宋詞)를 배우고 중학교에선 출사표·논어·맹자의 문장을 배웠다. 화교학교를 다니면서 그는 자연스레 외교관을 꿈꾸게 됐다. 한국 최고의 중국 전문가가 돼 양국의 가교 역할을 하겠다고 생각했다. 대학 진학 때 국립대만대학 정치학과를 지망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중국어과가 아닌 정치학과를 졸업한 것은 정상회담을 비롯한 고위급들의 회담에서 통역으로 일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중국인들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은유적인 화법을 많이 사용합니다. 문화적·정치적 배경을 잘 알고 있어야 올바른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그는 중국어를 잘하려면 무엇보다도 한국어를 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국어의 기초가 탄탄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외국어 실력을 높이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반복 학습과 암송은 기본이다. 경연대회 참가 등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면 지루함을 피하고 흥미를 늘릴 수 있다. 많이 읽고 많이 써보는 것도 중요하다.

여 서기관은 중·고교 시절 하루도 빠짐없이 중국어로 일기를 썼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어학 훈련의 홍수'에 풍덩 빠져야 한다는 게 여 서기관의 지론이다. 그는 고교 3학년 때 대전엑스포(93년) 중국어 자원봉사를 지원해 의전 담당으로 활약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중국어 실력을 갈고 닦았다.
"잘못해도 과감하게 도전하면 노력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 분야에 익숙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단순 회화 수준에서 벗어나 고급 중국어를 구사하려면, 옛날 고전부터 지금 유행하는 거리의 속어까지 모두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특히 고전에 대한 지식은 중요하다. 중국인들은 어릴 때부터 고전을 통해 수준 높은 언어를 배운다. 초등학교 저학년에 당시(唐詩)를 배우기 시작하고, 중학교 교과서에는 논어·맹자가 나온다. 그러다 보니 중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깊은 대화를 나누려면 중국 고전에 대한 지식은 필수적이다. 저잣거리 유행어는 중국 문화를 속속들이 접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지역별로 언어의 편차가 큰 것을 감안해 주요 지역의 사투리를 파악하는 것도 필요하다.

"각종 중국어 시험에서 지방 사투리는 고(高)난이도 문제로 다뤄지곤 하죠. 저도 한번은 한·중 고위급 회담 때 중국 측 통역이 중국 고위 관리의 말을 못 알아들어 당황하고 있는 걸 도와준 적도 있었어요. 중국 관리의 광둥어 사투리가 아주 심했거든요. 대만 유학 시절 룸메이트가 홍콩 출신인 덕을 본 것입니다."

그는 중국어는 1~2년 안에 배울 수 있는 언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배울수록 어려워지는 언어다. 최소한 3년 이상 꾸준히 공부해야 한다. 하지만 외워야 할 단어의 양이 많은 것은 아니다. 3000~4000개의 한자만 알면 책이나 신문을 읽는 데 어려움이 없다. 수만 개의 단어를 외워야 하는 영어와 다른 점이다. 그는 한국인들이 중국어를 배우는 데 있어 전 세계에서 가장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외국인들에게 한자는 마치 만리장성처럼 높은 벽이다. 하지만 한자문화권에 속한 한국인은 100m 달리기에서 20m쯤 먼저 출발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중국 대륙과 한국은 하루 생활권이자 하나의 문화권이 돼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국제사회에서 날로 높아가는 중국의 위상과 한·중 관계의 발전 잠재력을 감안할 때 중국은 기회의 땅이자 잘 사귀어야 할 파트너입니다."

글=박혜민
사진=신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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