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 페놀로 피부 녹인 ‘기적의 박피’ 결국 대형사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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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심부피부재생술’을 받고 부작용을 일으킨 한 피해자의 얼굴 모습. [서울중앙지검 제공]

“통증은 심하지만 두세 달만 참으면 새로 태어난다. 주름도 잡티도 다 없어진다. 남은 인생을 아기 피부로 살 수 있는 거다. 시술비 1000만원이 비싼 게 아니다.”

최근 기자가 찾아간 서울 청담동의 한 피부과. L원장은 “현존하는 최고의 미용 시술”이라며 심부피부재생술을 소개했다. 강한 산성 약품으로 피부를 녹여내 새살이 돋게 한다는 것이다. 그가 보여준 환자의 사진은 얼굴 피부가 녹아 빨갛게 진피층이 드러나 있었다. 기자가 얼굴을 찌푸리자 원장은 “막 시술을 받아서 이렇다. 두세 달만 이렇게 참으면 새 피부가 돋는다”며 깨끗해진 피부 사진을 보여줬다. 부작용을 묻자 “1% 정도에만 나타날 뿐”이라고 말했다.

서울 강남 일대에서 ‘궁극의 시술’로 입소문 났던 심부피부재생술. 독극물의 일종인 페놀 성분을 이용하는 것이다. 2004년부터 일부 피부과에서 시행돼 왔다. 하지만 상당수 환자들은 아기 피부 대신 화상 같은 흉터를 얻었다. 미국 의학교과서는 동양인에겐 맞지 않는 시술이라고 경고했지만 의사들은 이를 알려주지 않았다.

◆“기적의 시술” 거짓말=심부피부재생술을 국내에서 처음 시술한 의사는 T피부과의 P원장(지난해 사망)이다. 2004년부터 일부 매체에 광고를 내 ‘눈꺼풀 처짐, 주름·흉터와 기미까지 한 번에 개선해 준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페놀로 피부를 녹인다는 설명은 없었다. 찾아오는 환자들에겐 “간단한 시술로 부작용은 거의 없다”고 안심시켰다.

2006년 1월 T피부과를 찾은 A씨(40)는 이 설명을 믿었다. 1200만원을 내고 시술을 받았다. 얼굴이 타는 듯한 고통을 참고 석 달을 보냈지만 아기 피부는커녕 울퉁불퉁하고 빨간 흉터가 곳곳에 남았다. “어떻게 된 거냐”고 따지자 “시술을 좀 더 해보자”고 병원 측은 권했다. 그는 추가 비용을 내고 2007년 7월과 10월에 2, 3차 시술을 받았다. 결국 그의 얼굴은 절반 이상이 화상 자국으로 뒤덮였다.

A씨 같은 환자는 한두 명이 아니다. 심부피부재생술 피해자들이 모여 만든 다음 카페의 회원은 40여 명에 이른다. 이 중 16명이 T병원 의사들을 상대로 민·형사 소송을 냈다. 2007년 여름 같은 병원에서 2000만원을 내고 심부피부재생술을 받은 B씨(30대 초반)도 그중 하나다. 그는 시술 뒤 파혼을 당했다. 흉터 때문이었다. B씨는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결혼을 앞두고 예뻐지고 싶었다”며 “불면증과 우울증 때문에 수면제 처방까지 받았다”고 울먹였다.

지난해 4월 P원장은 갑자기 숨졌다. 과로로 인한 심장마비로 알려졌다. 하지만 일부 피부과 의사들은 “피해 환자들의 항의에 시달리다 숨졌다”고 말했다. 흉터 피해를 본 한 환자는 “P원장이 내게 ‘환자들 얼굴이 계속 떠올라 괴롭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전했다.

◆유사 시술 계속돼=심부피부재생술을 시술한다는 의사는 늘고 있는 추세다. 피부과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더 확실한 효과를 내세워야 손님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또 1000만~2000만원대로 1회 시술비가 비싼 점도 의사들이 이 시술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다. 기자가 찾아간 L원장 역시 “확실한 효과를 보고 나면 다른 시술을 권할 수 없다”며 부작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 피부과 전문의들은 이 시술에 대해 여러 차례 우려를 표명해 왔다. 몇몇 환자에게선 뚜렷한 효과가 나지만, 잘못되는 경우엔 돌이킬 수 없는 부작용이 생기기 때문이다. 서울위생병원 피부과 조태호 전문의는 “모 아니면 도 식으로 위험성이 너무 높은 시술”이라며 “공인된 시술법이 없어 각자 나름대로 배합한 화학 약품을 쓴다는 것도 문제”라고 설명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화학 약품을 이용해 심층피부를 녹여내는 시술은 백인에게만 적합할 뿐 동양인들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피부색이 짙을수록 깊은 상처가 나면 아무는 과정에서 울퉁불퉁한 흉터가 나기 쉽다는 것이다. 강남 이지함피부과 이유득(47) 원장은 “미국 의학교과서에서도 페놀을 이용한 박피는 동양인에겐 부적합하다고 적혀 있다”며 “과장된 광고에 속아선 안 된다”고 당부했다.

임미진·이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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