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비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25호 10면

회사든 집이든 진정한 권력자는 식사 메뉴를 결정하는 사람이다.
“점심에 월남쌈 해 먹을까?”

남편은 모른다

의문문처럼 보이지만 명령문이다. 아내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점심 메뉴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것 같지만 사실은 ‘월남쌈을 만들어줄 테니 그걸 먹어’라는 일방적 통보다. 권력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민주주의는 귀찮고 비효율적이다. 그래도 다들 민주주의가 좋다고 하니까 하는 수 없이 절차적 민주주의라도 확보하자는 속셈이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만일 누군가 눈치 없이 다른 제안을 한다면 곧바로 묵살당한다. 둘째 녀석의 경우처럼 말이다.

“다른 거 먹으면 안 돼요?”
“다른 거 뭐? 그냥 월남쌈 먹자.”
청유문처럼 보이지만 명령문이다. 권력자의 눈빛에 짜증이 어른거린다. 남편의 빠른 눈치가 발휘되어야 할 때다.

“삼계탕 먹으면 어떨까?”
“누가? 당신이 요리할래요?”
그렇다. 아내 말고 아무도 요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용히 아내가 해주는 것을 먹어야 한다. 물론 감사하면서 말이다.

요리하는 사람 쪽에서 보면 월남쌈은 괜찮은 메뉴다. 차려놓으면 푸짐하지만 요리 과정은 간단하다. 돼지고기만 굽고, 각종 야채만 썰어 내면 요리 끝이다.
메뉴가 결정되었으니 아내는 냉장고에서 재료를 확인한다. 라이스페이퍼도 넉넉하고 당근, 오이, 무순, 버섯, 양파, 토마토, 게맛살도 충분하다. 권력자는 냉장고 문을 닫으며 이렇게 말한다.

“돼지 목살이 없네.”
평서문처럼 보이지만 명령문이다. 남편은 목살을 사러 간다. 그리고 남편이 사온 돼지고기는 아내가 원하던 것이 아니다. 남편은 덩어리로 사온 것이다. 생각 없는 남편과 함께 사는 아내는 돼지고기 덩어리를 직접 썰어야 한다.

“당신 월남쌈 한 번도 안 먹어봤어? 마누라 골탕먹이려고 일부러 덩어리를 사온 거지?”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럴지도 모르겠다. 낑낑대며 칼질하는 아내를 보며 남편은 자신이 꼭 돼지고기 덩어리가 된 것 같은 절망에 사로잡힌다.

요리가 완성되고 가족은 식탁에 앉아 월남쌈을 먹는다. 후각이나 청각으로 먹는 요리도 있지만 월남쌈은 촉각으로 먹는 요리다. 최대한 쌈을 크게 싸서 입안 상피세포를 꽉 압박하는 느낌이 들게 먹어야 제맛이 난다. 아내가 눈총을 주든 말든 남편은 입이 찢어져라 쌈을 싸 먹는다.

이렇게 먹어두어야 하는 데는 남편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다. 아내가 밥을 몇 술 뜨다 말고 이러기 때문이다.

“덩어리 고기 썬다고 어깨랑 팔이 다 나갔나 보네.”
평서문처럼 보이지만 명령문이다.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대한민국 유부남헌장』과 『남편생태보고서』책을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