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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밟은 12인, 지구 위의 삶 40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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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우주 정책은 국가가 수립하지만 실행하는 것은 우주인을 비롯한 사람이다. 아폴로 계획에는 40만 명이 참가했다. 현재 35개국 508명이 우주에 다녀왔다. 그중 미국인이 321명으로 64.3%를 차지한다. 321명 중에서 달을 밟아 본 문워커(moonwalker)는 12명에 불과하다. 어떤 사람들일까. 문워커인 찰스 콘래드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으면 색깔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경구를 남긴 바 있다. 문워커들의 삶과 달 체험의 연결고리에서 발견되는 업적과 색깔을 들여다본다.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다. 우주인들은 24일에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이들이 생환하지 못할 경우에 대비해 담화문을 준비했다. 이처럼 우주인이 된다는 것은 민간인보다는 군인에게 어울리는 위험한 일이었다. 미국 최초의 우주인 선발이 59년에 있었다. 미 항공우주국(NASA)이 군에 의뢰해 후보를 추천받았다.

문워커 12명은 미국이 자랑하는 인재들이다. 이들이 있었기에 “60년대가 끝나기 전에 미국인이 달을 밟는다”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비전이 성취됐다. 대부분 항공공학 혹은 우주항공공학을 공부했으며 모두 전투기 조종 경력이 있었다. 에드윈 올드린은 한국전 당시 F-86기를 몰고 78회 출격해 MIG-15기를 두 대 격추시키기도 했다.

물론 이들이 문워커가 되기 전 순탄하기만 한 삶을 산 것은 아니다. 찰스 콘래드는 결국 프린스턴대에 입학했지만 당시로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난독증 때문에 다니던 고등학교의 오해로 퇴학을 당하기도 했다. 61년 미국 최초의 우주인이 된 앨런 셰퍼드는 메니에르병을 앓아 한때 문워커 선발 대상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건강한 정신과 신체가 우주인 선발 기준이었기에 문워커들은 대부분 장수하고 있다. 제임스 어윈(91년 심장마비), 찰스 콘래드(99년 오토바이 사고), 앨런 셰퍼드(98년 백혈병)를 제외한 9명의 문워커가 생존해 있다. 이들은 달에서 ‘최초’ 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한 사람에게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라는 불멸의 말을 남기며 달에 처음 발을 내디딘 것은 닐 암스트롱이지만 달에서 처음 춤을 춘 것은 찰스 콘래드였다.

달에서 처음으로 골프공을 날린 것은 앨런 셰퍼드, 처음 투창을 던진 것은 에드거 미첼이었다. 데이비드 스콧은 망치와 새털을 떨어트려 갈릴레오의 실험을 달에서 처음으로 재현했다. 암스트롱은 달나라 최초의 성찬식을 거행했다. 목사가 준비해 준 밀떡과 포도주를 가져갔던 것이다. 암스트롱의 성찬식은 사적인 것이었다. 당시 NASA 등 공공기관의 종교행사가 위헌이라는 소송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달에 착륙했던 문워커들이 평생 ‘시달린’ 게 있다. “달에서 받은 느낌이 어떠했느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다. 이들은 NASA에서 각종 훈련을 받았지만 이 질문에 답하는 훈련은 받지 못했다. 게다가 우주 여행에서 필요한 자질 중 하나는 위기에도 침착할 수 있는 정신적 안정성이기 때문에 이들은 비교적 무덤덤한 사람들이었다.

에드윈 올드린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고 했다. 문워커 중에서는 달에서 강한 종교적 체험을 한 이들도 있었다. “그전에도 그렇지만 달에서 보다 더 강력하게 신(神)의 힘을 느꼈다”고 말한 제임스 어윈은 NASA에서 은퇴한 뒤 비영리 종교재단을 세웠다. 성지순례단을 조직하는가 하면 노아의 방주를 찾아 수차례 터키에 있는 아라라트 산에 오르기도 했다. 아라라트 산은 노아의 방주가 홍수가 끝나고 닿았다는 산이다. 어윈은 82년 하산 중 부상하기까지 했다. 찰스 듀크는 “달 착륙 경험에서 어떤 철학적인 의미는 찾지 못했다”고 술회했지만 훗날 크리스천이 돼 선교재단을 설립해 교도소 목회를 했다.

신비 체험이 반드시 기독교 신앙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달에서 마지막으로 떠나온 문워커인 유진 서넌은 “우연히 생겼다고 보기엔 우주는 너무나 아름답다”며 “우리의 삶을 꾸려 가기 위해 인간이 만든 모든 종교 위에는 우주의 창조주가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문워커들의 삶은 그들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달 착륙 이후 달라졌다. 암스트롱은 “친구들과 동료들이 갑자기 약간씩 나를 예전과 다르게 대하기 시작한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앨런 빈은 의도적으로 삶을 바꾼 경우다. 그는 “지구로 돌아가면 내가 바라는 삶을 살겠다”고 달의 궤도에서 결심했다. 빈은 “달 체험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를 드러낸다”고도 말했다. 달이 드러낸 것은 빈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81년 49세에 NASA에서 은퇴하고 휴스턴에 있는 화실에서 작업을 했다. 그는 달만 그린다. 달에 색상을 입히는 것과 달에서 묻어 온 먼지를 그림에 사용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문워커들은 NASA에서 은퇴한 뒤 다양한 분야에 진출했다. 암스트롱은 신시내티대 교수, 크라이슬러 대변인, 비행 소프트웨어 회사 회장 등으로 활약했다. 데이비드 스콧과 유진 서넌은 회사를 창립했다. 해리슨 슈미트는 뉴멕시코주에서 공화당으로 출마해 미 연방 상원의원이 됐다.

암스트롱도 모든 정파로부터 정계 진출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5년마다 한 번씩 백악관에서 열리는 달 착륙 기념행사에 참석하지만 여간해선 인터뷰나 강연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암스트롱 또한 유명세를 피할 수 없었다. 그는 94년부터 사인해 주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그의 사인이 1000달러에 팔리고 있는 데다 가짜 사인까지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부터다. 2005년에는 20년 단골인 이발사와 법적 분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암스트롱의 머리카락을 이발사가 수집가에게 3000달러에 몰래 팔았던 것이다. 암스트롱은 머리카락을 그에게 돌려주거나 자신이 지정하는 자선단체에 3000달러를 기부할 것을 요구했다.

문워커들은 자서전 저술로 달 체험을 일반인에게 알리는 작업도 했다. 앨런 빈의 『아폴로』(98년), 암스트롱의 『첫 번째 인간』(2005년), 올드린의 『지구 귀환』(73년)과 『거대한 황량함』(2009년) 등의 자서전이 나왔다. 데이비드 스콧은 알렉세이 레오노프와 공저로 『달의 양면』(2004년)을 내놨다. 레오노프는 65년 세계 최초로 우주 유영(游泳)에 성공한 옛소련 우주비행사다. 특히 달 체험 후 15년간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올드린은 『지구 귀환』에서 우주인은 수퍼맨도 성인도 아니라는 것을 역설했다. 두 번 이혼하고 세 번째 결혼한 올드린은 강연마다 3만~5만 달러를 받으며 우주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전도자 역할을 하고 있다.

특이한 활동을 하는 문워커도 있다. 에드거 미첼은 유엔에 ‘세계 의회’를 설립해야 한다는 운동을 펼치고 있다. 미첼은 또한 “우주는 우연히 작동하는 게 아니다”고 주장하며 73년 ‘지력(知力) 과학연구원’을 설립해 마음과 의식에 대한 연구를 후원하고 있다. 그는 2008년 미국 등 각국 정부가 60년 동안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했다는 것을 숨겨 왔다고 주장했다. 올드린도 2005년 한 인터뷰에서 아폴로 11호에서 미확인비행물체(UFO)를 봤다고 주장했는데, 나중에는 언론이 자신의 발언의 진의를 왜곡했다며 UFO를 봤다는 주장을 번복했다.

12명밖에 안 되는 문워커들이기에 이들은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최근 해리슨 슈미트와 에드윈 올드린은 지구온난화에 대한 앨 고어 전 부통령의 주장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에 참가했다. 문워커들은 무엇보다 미국이 다시 달로 가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 위해 그들의 영향력을 활용하고 있다. 존 영은 “우주 비행도 위험하지만 지구에 남아 있는 것도 위험하다”고 말한다. 슈미트는 “다시 달로 가는 것은 우리가 후세 인류에게 지고 있는 빚”이라고 말한다.

바야흐로 21세기 문워커, 마스워커(marswalker)의 시대가 오고 있다. 20세기 문워커의 탄생은 미·소 냉전의 연장인 미·소 우주 경쟁의 산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폴로 11호 문워커들은 67년 비행 중 희생된 최초의 우주비행사인 블라디미르 코마로프와 68년 훈련 도중 사망한 유리 가가린을 기념하는 메달을 달에 남기고 왔다. 21세기는 다국적 문워커의 협력시대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NASA는 올해 3500명의 지원자 중에서 18명의 우주인 후보생을 선발했다. 그들의 직업은 교사·의사·과학자·엔지니어 등 보다 다양해졌다.

김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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