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만강~' 국민가수 故김정구선생 발자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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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두만강 주변은 수풀이 많고, 조그만 배들이 다니는 한적하고 쓸쓸한 분위기였지. 해방전 순회공연 갈때마다 으례 거쳤는데, 지금도 눈에 삼삼해요. 그리고 금강산 - 코흘리개 시절부터 올랐던 정겨운 산이지. 어린 마음에도 너무 아름다워 소변도 참고 바라본 기억이 생생해…. " '눈물 젖은 두만강' 에 겨레의 애환을 담고 한세기를 풍미한 국민가수 김정구는 10년전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두만강을 남의 땅 (중국)에서나마 볼 수 있게됐고, 금강산도 유람선을 타고 찾아갈 날이 임박한 지금 '눈물 젖은 두만강' 의 주인공은 미국에서 6년간 노인성 치매와의 투병끝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김씨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중학진학도 포기하고 신문배달.점원생활등 고생을 하다가 교회에서 부르는 그의 찬송가 실력을 눈여겨 본 도쿄유학생의 추천으로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17세때 서울서 '어머님의 품으로' 를 부르며 데뷔한 그는 2년뒤 작곡가 이시우씨가 한.만국경에서 독립군인 남편을 잃고 우는 여인을 보고 지어준 '눈물 젖은 두만강' 을 메이저 음반사인 OK레코드에서 취입하면서 이난영.고복수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스타로 떠오른다.

이 노래는 애조띤 멜로디와 민족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가사로 인해 일제에 의해 금지당했지만 그는 '낙화3천' '바다의 교향시' '앵화폭풍' 등을 연속히트시키며 일본.만주까지 순회하는 대가수로 성장한다.

모두 7백여곡의 발표곡 기록을 가진 그는 지금은 애절함이나 한으로 기억되는 가수지만 전성기였던 30~50년대에는 발랄하고 해학적인 노래들로 더 사랑받은 가수였다.

'수박타령' '왕서방연서' '총각진정서' '코리안맘보' 등 제목만 들어도 서민적 해학이 가득한 노래들이 그의 주된 레파토리였다.

70년대 이후 옛 우리가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젊은이들 사이에 통일.민족의식이 싹트면서 '눈물젖은 두만강' 이 재조명을 받자, 김씨의 위상은 차원을 달리하게된다.

이 노래로 그는 옛 동료들이 물러난 이후에도 최원로가수로서 방송과 야간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었고 80년 연예인으로는 처음으로 문화훈장을 받았다.

또 5년뒤 분단 40년만의 남북예술단 교환공연에도 참가했다.

그는 이때 "50년동안 수만번을 불렀지만 노래가 잘 안된다" 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70세가 되면 물러나야지" 라고 말했지만 일흔을 한살 넘긴 87년 40여일간의 미국순회공연을 거뜬히 마치고 야간무대에도 매일 2~3곳씩 설 만큼 왕성한 활동력을 보였다.

하나 세월의 파도는 결국 김씨의 노구를 덮쳤다.

"가수는 언제나 좋은 모습으로 기억돼야한다" 고 말해온 김씨는 투병 기간 내내 가족외에 일체 접촉을 끊고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김씨와 고향이 같은 원로가수 신카나리아 (88) 씨는 "그는 영원히 '발랄한 가수' 로 팬들에게 남고싶었던 것" 이라며 애통해했다.

강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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