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샛별] 뮤지컬 드림걸즈 주인공 에피역 차지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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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지연씨는 따로 레슨을 받은 적은 없지만, 알리샤 키스와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독학으로 노래를 배웠단다. “기회가 된다면 음반을 꼭 한번 내고 싶다”며 가수가 되고 픈 욕심도 숨기지 않았다. [김태성 기자]

그는 화려한 무늬의, 몸에 착 붙는 원피스를 입고 인터뷰장에 나왔다. 순간 눈을 잠시 의심했다. ‘어제 공연에서 봤던 퉁퉁한 여자 맞나’ 싶었다. “몸매가 예쁘다”며 인사말을 건네자 그가 눈을 흘겼다. “놀리시는 거예요. 이번 역 때문에 엄청 살 찌웠다고요.”

뮤지컬 배우 차지연(27). 올해 한국 뮤지컬계가 발굴해 낸 최고의 유망주다. 다음달 9일 막을 내리는, 상반기 최고 화제작 ‘드림걸즈’의 주인공 에피 역을 가슴 절절하게 소화해 냈다. 4번째 출연작으로 스타 대열에 합류하며, 제3회 더 뮤지컬 어워즈 여우주연상 후보로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15㎏ 빼기? 아니 찌우기!

그는 키가 늘씬했다. 172㎝. 공연 전 몸무게는 55㎏였단다. 못 생기고 뚱뚱한 에피역으론 부적절했다. 공연 두 달 전부터 몸집 불리기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가능하면 기름진 것만 먹자”고 모토를 세웠다. 아침에도 삼겹살을 먹었다. 최소 3인분씩. 피자·아이스크림·떡 등 간식 거리도 달고 살았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천하장사 마돈나’에 출연한 배우가 살 찌기 위해 만두를 먹었다더라고요. 저도 이틀에 한번씩, 토할 만큼 군만두를 먹었어요.”

한 달만에 체중이 15㎏ 늘었다. “제 원래 별명이 ‘태릉선수촌’이에요. 하루에 수영 2시간, 공원 트랙 15바퀴 돌기, 웨이트 트레이닝 1시간 30분 등 거의 운동 중독 수준이었죠. 어서 공연 끝나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어요.”

#아르바이트 20개

20대 후반의 나이지만 그의 삶은 곡절이 많다. 그는 대전 출신이다. 외할아버지는 판소리 인간문화재 박오용 옹이다. 그 끼를 이어 받아 세 살 때부터 북을 두들기며 ‘국악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다. 장구·징·꽹과리를 익혔고, 거문고·가야금도 탔으며, 창도 배웠다.

시련은 고3 때 찾아왔다. 건설업을 하던 아버지가 부도를 냈다. 집엔 차압 딱지가 붙었고, 가족은 흩어져야 했다. 그는 여섯살 터울 여동생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왔다.

방 한칸을 얻어 동생을 챙기며 ‘소녀 가장’ 노릇을 했다. 대학 진학은 꿈도 못 꾸었다. 광고 전단지를 돌리고, 호프집 서빙을 보았으며, 인형 탈을 쓰기도 했다. 2006년 뮤지컬 무대에 데뷔하기 전까지 어림잡아 20개가 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린 나이에도 굴곡진 삶을 살아온 ‘에피’를 잘 연기 한다는 평을 듣는 그는 에피에게서 자기 모습을 본다고 했다.

#쇳소리가 나는 미성

그는 한때 가수를 지망했다. 여섯 군데 신인 가요제에 나가 모두 1등을 차지했다. 그러나 끝내 음반은 내지 못했다. “사기를 당하기도 하고, 제작사랑 의견이 다르기도 하고….”

고된 준비 과정은 대신 그의 음악적 역량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발라드와 R&B, 댄스 음악은 물론 트로트까지 자유롭게 넘나들게 됐다. 음색은 독특하다. 중저음일 땐 미성에 가깝지만 고음으로 치고 나갈 땐 탁한 쇳소리로 심장의 끝자락을 확 긁어댄다.

“뻔한 소리 같지만 전 진실되게 불러요. 흉내내지 않죠. 그게 제 가장 큰 무기에요.”

그는 얼마 전 착실하게 번 돈으로 대방동에 방 세 칸짜리 단독 주택을 사,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됐다고 한다. ‘드림걸즈’ 마지막은 이렇다. 시련을 꿋꿋이 견뎌낸 못난이 에피가 성공을 향해 치고 올라가며 가슴 찡한 노래 한 곡을 선사한다. 그건 어쩌면 현실 속 ‘배우 차지연’의 노래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최민우 기자 , 사진=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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