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유주열] 대한국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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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의 99주년을 맞아 최근 다롄시의 뤼순감옥을 다시 방문, 안의사가 사형을 당하기 전까지 수감되어 있었던 방을 둘러보았다. 당시 일본 최고의 영웅이며 정치 지도자인 이또 히루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안의사는 국사범으로 분류되어 특별 감시를 받았다. 안의사의 감방은 안의사를 근접 감시하기 위해 간수장 바로 옆 특별감방에 배치되었다고 한다.
밖에서 들여다 보이는 감방은 작은 사무실처럼 작은 테이블과 함께 벼루와 먹도 가지런하게 놓여 있다. 그리고 벽에는 형장으로 끌려가기 한 시간 전에 썼다는 爲國獻身軍人本分(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의 모조품이 걸려있다. 이 글은 모든 군인들에게 좌우명이 된 유명한 글귀이다.
안의사가 백 년 전 1909년 10월 26일 이또를 저격하는 하얼빈 거사에 성공하고 뤼순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1910년 3월 26일 사형을 받기까지 근 5개월간 뤼순감옥에서 200점이 넘는 유묵을 남겼다고 한다. 뤼순감옥의 일본인 간수 뿐 아니라 많은 근무자들이 안의사의 “동양평화론”에 공감하고 안의사를 존경하여 그의 글을 받아 갔다.
안의사는 낙관 대신에 반드시 손도장(掌印)을 찍었다고 한다. 안의사는 러시아 령에 있을 때 동지 11명과의 斷指동맹을 하여 왼 손가락 일부에 마디가 없다. 그의 손도장은 왼손 바닥에 먹물을 묻혀 꾹 눌려서 찍혀 나온다. 그리고 “大韓國人 安重根“ 이라고 썼다. “朝鮮人” 안중근이 아니다. 그는 거사직후에도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大韓萬歲)를 부르는 등 大韓國人이었음을 천하에 선언하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고유의 연호를 써는 독립국가였다. 그러나 일본이 1905년 보호령을 발동하면서 대한제국을 억지로 조선으로 고쳐 불렀다. 더 이상 독립국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중국)과의 시모노세끼(下關) 강화조약 제1조에서 조선의 독립을 천명하였다. 이는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정말로 원했던 것이 아니고 조선이 청의 속국에서 벗어나면 다시 일본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한 수순 밟기였다. 일본이 그 후 대한제국을 독립국 “대한” 대신 속국 “조선”으로 고집한 이유이기도하다. 안의사는 이러한 일본의 음흉한 의도를 간파하여 자신은 일본의 속국 조선인이 아니고 독립국가 大韓國人임을 떳떳하게 주장한 것이다. 일본은 아직도 우리 韓半島를 조선반도로 부르고 있다.

유주열 전 베이징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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