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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은 나의 힘’ 해외작가 탐방 1 - 레이프 라슨 (미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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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한국 문학에 장편소설 바람이 불고 있다. 장편문학상이 속속 제정되고, 젊은 작가들도 장편에 눈을 돌리고 있다. 이대로 가면 독자들로부터 외면받는다는 기존의 문학 위기론에다 영화·드라마를 통해 문학작품이 대량 소비되는 환경의 변화 등이 작용한 결과다. 이 시대 장편소설에 요구되는 덕목은 틀을 넘어서는 상상력이다. 순수·대중의 딱딱한 구획에서 벗어나고, 만화·판타지·팩션 등을 아우르는 탈경계와 탈장르다. 중앙일보가 올해 제정한 중앙장편문학상이 기성과 신인작가, 순수와 장르문학 모두에 활짝 문호를 개방한 것도 그때문이다. 경계와 장르 허물기는 외국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분위기를 선도하는 미국·일본 작가들을 연속 인터뷰한다.

레이프 라슨은 소설 스피벳-어느 천재의 기묘한 여행의 주인공처럼 자신도 “지도와 다이어그램 등을 통해 세상을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올해 만 스물 아홉살인 미국 작가 레이프 라슨은 데뷔작으로 미국 출판계의 ‘신데렐라’가 됐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이색적인 판형(가로·세로 19.5X23.5㎝), 제도 도구 상자를 연상시키는 표지 등 독특한 장정의 첫 소설 『The Selected Works of TS Spivet(TS 스피벳 작품선)』에 대해 ‘스릴러의 제왕’ 스티븐 킹은 “마크 트웨인과 토마스 핀천, 영화 ‘리틀 미스 선샤인’을 뒤섞어 놓은, 불가능한 일을 해낸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레이프 라슨은 중앙일보 독자를 위해 즉석에서 삽화를 그려주었다. 삽화 오른쪽 위는 한반도 모습. 아래 부분 ‘gassho’는 불교 용어 ‘합장’의 영어 표현. 라슨은 선불교 신자다.

결국 10개 출판사가 경쟁을 벌인 끝에 펭귄 출판사가 100만달러에 판권을 가져갔다. 전세계 24개국에도 판권이 팔려 국내에선 지난 주 『스피벳-어느 천재의 기묘한 여행』(비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소설은 손글씨 느낌을 주는 서체(갯마을체)로 인쇄된 사이드바(측면 주석), 저자가 직접 그린 300여 장의 그림, 본문과 사이드바를 잇는 화살표 등이 어지럽게 뒤섞여 얼핏 자연과학 서적을 보는 것 같다.

몬타나주의 한 시골마을에 사는 열 두살 소년 스피벳이 빼어난 자연과학 도해들을 제공한 공로로 스미소니언협회의 초청을 받자 혼자 집을 나서 1800마일(약 2800㎞) 기차여행을 한 끝에 워싱턴에 닿는 과정을 그렸다. 소년의 천진한 시선, 소설 특유의 유머가 따뜻한 느낌을 주지만 진화론 초창기의 갈등, 미국 독립 전쟁 등 풍부한 읽을거리를 제공해 묵직한 맛도 있다. 스피벳은 철부지만도 아니다. 냉담한 과학자 엄마, 약골인 아들이 못마땅한 카우보이 아버지, 동생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 등에 시달린다. 천진함 아래 감춰진 여린 속살이 안쓰러울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은 여행기(트래블로그)이면서 성장소설이자 부모를 이해하게 되는 가족소설이다.

15일(현지시간) 뉴욕 브루클린 자택에서 저자를 만났다. 그는 “소설은 무엇보다 재미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티븐 킹의 평가가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나.

“마크 트웨인같은 작가와 함께 거론된다는 자체가 영광이다. 마크 트웨인의 대표작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동화책같지만 어린이의 눈을 통해 인종차별 등 당대를 비판했다. 내 또래 미국 작가들이 포스트모던 소설의 선구자로 치는 토마스 핀천은 과학자들의 지하 비밀 세계 등을 즐겨 다뤘다. 영화 ‘리틀 미스 선샤인’은 이상한 가족이 나오는 로드무비다. 내 책이 아마 그런 작품들을 조금씩 닮은 것 같다. 시간 배경이 모호하다는 점에서 동화적이고, 체제에 삐딱한 과학자 모임인 메가테리움 클럽이 등장하는 것도 그렇다.”

-책 한 권으로 슈퍼스타가 됐는데 성공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나.

“내가 생각보다 정상적이거나 사람들이 비정상적이어서 내 이상한 소설이 먹히는 것 같다. 또 미국 서부 얘기를 상당히 많이 하는데 아마 외국 독자들이 그에 대한 동경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콜럼비아 대학에서 실험적인 작업을 하는 선생들에게 문학을 배웠다. 나 스스로 포스트모던한 작가가 아니라고는 하지 않겠다. 하지만 난 작품의 캐릭터(인물)나 서사에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 작가라 할 수 있다. 독자들이 한 번 캐릭터의 고통에 공감하게 되면 소설은 독자를 어디로든 데려갈 수 있다.”

-사이드바, 그림들은 어떤 효과를 위해 도입했나.

“열 두 살 소년의 산만해지기 쉬운 속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본문과는 달리 일종의 독백 형식인 사이드바에서 스피벳은 ‘자기방어 가드’를 내린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이드바를 건너뛰고 읽으면 안된다.”

-사이드바의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었나.

“정확히 이런 장치를 활용한 작가는 이전에 없었다. 물론 이미지를 적극 활용한 중세시대 책 등을 참고하기는 했다. 난 소설의 역사도 결국 다른 예술분야처럼 도둑질의 역사라 생각한다. 얼마나 잘 하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진정한(authentic) 저자의 죽음’을 얘기한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의 논리같다.

“무엇이 진정한 것인가. 모든 것은 반작용이고 제스처다. 모든 이야기는 수 천 번씩 반복해서 말해진 것들일 뿐이다. 결국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새롭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소설은 무엇을 추구해야 하나. 재미인가, 메시지인가 아니면 문학성인가.

“나는 스스로 스토리텔러라 생각한다. 다큐 필름도 만들었는데 소설이나 다큐 필름이나 결국 하고자 하는 얘기에 독자들이 어떻게 관심 갖게 할지 고민하는 작업이다. 그러려면 흥미로운 인물을 창조해야 하고, 고통스럽더라도 이야기와 씨름하는 것을 사랑해야 한다. 동의하지 않는 작가들이 있겠지만 나는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작품이 도전이 되서는 안된다.”

-SF·스릴러·추리 등 여러 요소가 섞여 있다. 기존 소설 작법에 구애받지 않나.

“장르 구분은 글 쓰는 사람이 아니라 책 파는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레이먼드 챈들러를 훌륭한 탐정소설 작가라고 하는데 그는 훌륭한 작가일 뿐이다. 문학의 어떤 관습들은 깨어지라고 존재한다. 지금 미국에서는 새로운 종류의 스토리텔링을 선보이는 젊은 작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글·사진 뉴욕=신준봉 기자

◆레이프 라슨(Reif Larsen)=1980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다. 하버드대에서 20년간 강의한 북디자이너 아버지, 화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지도나 그림을 통해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어려서부터 작가가 되기를 꿈꿨고 콜럼비아대 소설 창작 석사를 마쳤다. 자료 조사, 현장 방문 등 집필에 4년이 걸린 첫 소설 『The Selected Works of TS Spivet(TS 스피벳 작품선)』이 대박을 터뜨렸다. 책 소개 홈페이지(www.tsspivet.com)를 운영 중이며 store.tsspivet.com에서 책 속 스피벳의 그림이 인쇄된 티셔츠도 판다. 현재 뉴욕 브루클린에서 러시아문학 박사 과정을 밟는 여자친구와 함께 살면서 발칸 반도·콩고를 배경으로 한 스릴러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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