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쪼개진 리듬 위 ‘수학적 무용’의 세계를 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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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호 05면

“모리스 베자르보다 더 세련됐다.”
“이젠 어떤 경지에 도달했음이 섬뜩하게 전해졌다.”
일주일이 지났다. 그러나 후폭풍에 가까운 여진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현대무용 안무가 안성수(47 . 사진 )씨 얘기다. 그의 신작 ‘20세기 위대한 춤곡-장미&mating dance’가 지난 17일부터 사흘간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에서 열렸다. 600여 석의 객석은 빽빽했다. 관객은 숨죽였고, 희미한 불빛 아래 무용수들은 숨 가쁘게 움직였다. 세트 하나 없이 단 6명의 무용수만으로 이 널찍한 무대를 빈틈없이 메워 간다는 건 기적에 가깝다. 공연이 끝난 뒤 평단도, 무용 팬들도 하나같이 뜨겁게 호응했다. 안무가 안성수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안성수의 현대무용 ‘20세기 위대한 춤곡-장미&mating dance’, 7월 17~19일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암호, 무용이 되다
그의 춤은 서늘했다. 무용평론가 문애령씨는 “기존 한국 안무가들은 자신의 감성을 어떻게 전달하는가에 매달린다. 반면 안성수씨는 감성보단 사물을 객관화해 ‘차가움’을 효과적으로 전한다”고 평했다.이런 춤이 가능한 이유는 음악의 분석에서 출발한다. ‘장미’를 예로 들어 보자. 이 작품은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무대화했다. 작품 구상은 지난해 1월부터 했다. 자신이 이끄는 ‘안성수 픽업그룹’ 멤버들과 함께 “공부하자”며 매달렸다.

‘봄의 제전’은 총 32분으로, 8장으로 구성돼 있다. 수치상으로만 따지면 한 장당 4분의 시간이 소요되는 꼴이다. 그리고 각 장을 몇 개의 소악절(phrase)로 또 나눈다. 음가가 조금씩 차이 나는 마디별로 소악절은 나뉘게 되며, 대개 한 소악절은 10초 안팎이다. 이렇게 나눈 소악절에 박자를 붙이기 시작한다. 어떤 건 8개의 박자가 들어가고, 어떤 소악절은 11개의 박자가 붙여진다. 그래서 그의 작업 노트엔 ‘8-11-6-6-5-7…’식의 숫자가 나열된다. 암호 같지만 안성수 춤의 기본 단위가 완성돼 가는 순간이다.

이 대목에서 안무가와 단원들 간에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안무가는 한 소악절을 8박자로 붙이는 데 반해 단원들은 10박자가 편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에 최소 4번 이상 음악을 반복해서 듣는” 이유는 바로 이런 간극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난수표를 분석해 내듯 복잡하고 까다롭지만 정확한 계산이 바탕이 됐기에 안성수의 춤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수학적 무용’이란 신기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중간 단계 없이 직행하라
소악절에 박자 붙이기는 일종의 ‘설계도’다. 건물이 완성되려면 골격이 세워지고 살도 붙어야 한다. 이제 ‘동작 입히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안무가는 ‘타로 카드’를 활용했다. 무작위로 타로 카드 10장을 뽑아냈다. 어떤 건 현자가 그려져 있고, 어떤 카드엔 여승이 있으며, 다른 것엔 별 모양이 새겨져 있다. 타로 카드에 있는 현자·여승·별 등의 모양에 맞춰 동작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만들어 낸 10개의 동작은 골격에 해당한다. 그걸 각 소악절에 적용시킨다. 특별한 법칙은 없다. 무작위다. 다만 소악절과 소악절 사이에 간격이 뜨거나 도저히 동작 연결이 어려울 땐 약간의 응용 동작이 가미된다. 접착제와 같은 역할이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무용에도 어떤 흐름이 있고 테마가 있다. 그런데 무작위로 삽입시킨 동작이 특정 부분의 음악과 딱 맞아떨어진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안무가의 답은 이랬다. “음악이 사랑을 표현한다고 치자. 그렇다고 동작에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낸다면 너무 초보적이고 유치한 것 아닌가.” 그의 설명에 의하면 어떤 동작을 하더라도 그것이 음악과 완전히 동떨어진, 예를 들어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미세한 선율에서 펄쩍펄쩍 뛰는 식의, 동작만 아니라면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말도 덧붙였다. “우린 보통 음악을 듣고, 거기서 어떤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려 낸 다음 이를 무용 동작으로 형상화하려 한다. 이건 중간 단계를 거치거나 번역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반면 나는 정확하게 조각 낸 리듬에 기계적인 동작을 삽입시킨 뒤 이를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한다.” 마치 중간 유통상 없이 상품을 바로 소비자에게 파는 것과 같은 원리인 셈이다. 작품의 감성은 오히려 무용수가 동작을 반복적으로 연습하면서 자연스럽게 체득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에둘러 가지 않고 직행하기. 그의 춤이 가슴 한쪽을 확 찔러 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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