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비추되 들어오길 거부하는 공중 연못의 패러독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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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호 31면

①3층 복도의 창을 통해 외부와 연결되는 연못이다. 이 연못은 1층 마당에서 바라볼 때는 불투명한 조형이고 위에서 보면 물에 비친 하늘이 보인다. ②건물이 약간 기울어져 있다. 건물 3층 중앙엔 연못 공간의 구조물이 앞으로 튀어나와 있다. ③건물과 콘크리트 구조물 사이에 마당이 나 있다. 오른쪽에 3, 4층을 오르는 계단실이 있다. 신동연 기자, 스튜디오 어싸일럼

파주출판도시의 청림출판사(현재 한국전자출판협회가 세들어 있다)를 설계한 건축가는 자신의 건물에 ‘누멘’이란 이름을 붙였다. 누멘은 사물과 장소에 있는 정령을 뜻하는 라틴어다. 어원적으로 고개를 끄덕인다는 뜻도 있다. 신화에서는 올림포스를 다스렸던 주피터가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순간 고개를 끄덕였다는 내용으로 등장한다. 집이 들어선 터의 지형, 인공의 지반과 구조체들, 그 모든 것을 포함하는 자연을 터에 내재하는 마력의 힘으로 삼겠다는 작가적 의지의 표명이다. 정령이 있는 집, 세속적인 사회에서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건축가는 이곳에 적층된 인자들을 캐내는 ‘장소의 고고학’을 실천했다. 이 고고학을 추적하는 것이 그렇게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사색이 머무는 공간 ⑮파주출판도시 청림출판사 사옥 ‘누멘’

우선 집터 바로 옆에 있는 물길과 갈대 숲, 그리고 그 앞에 펼쳐 있는 한강 하류와 그 뒤를 지켜주는 심학산의 먼 풍경이 있다. 이 터는 습지를 메운 인간의 어리석음이 기억으로 남아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건물이 파주출판도시에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파주출판도시의 건축주와 건축가는 특수한 조건 속에서 건축을 했다. 개별 건축주의 요구 사항과 출판도시 전체가 지켜야 하는 건축 지침이 있다. 1999년 파주출판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할 때 조합원들과 그 디자인을 주도한 건축가들은 도시 전체가 공유하는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건축의 원칙에 합의했다. 건물 사이에 담을 없애고, 서로 다른 건물 앞을 지나가는 길에 같은 바닥 재료를 사용하고, 모두가 강과 산에 대한 조망을 누릴 수 있게 한다는 등의 목표를 세웠다. 건물의 형태와 재료도 제한했다.

지침에 따르면 습지대 바로 옆에 위치한 건물들은 명료하면서도 출판도시 전체와 어우러진 간단한 상자 모양이어야 한다. 건물 안팎에서 심학산과 한강을 이어주는 통로를 열어 주어야 했다. 청림출판사의 설계를 맡은 김헌은 출판도시를 ‘캠퍼스’라 부르며 건축 지침의 정신을 존중하였다.

심학산과 한강을 잇는 통로
그렇다면 건축가는 이러한 땅과 자연에 대한 모든 정보, 건축주의 요구와 파주출판도시의 건축지침을 인자로 삼아 디자인이라는 방정식에 대입하여 설계를 완성하였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건축설계를 위한 모든 정보를 완벽하게 갖춘다 하더라도 건축가는 일련의 판단과 선택을 하고, 수없이 많은 가능성 중에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건축가마다 그 결정을 하는 방식이 다르다. 김헌은 모순의 논리, 패러독스를 통해 건축 설계를 진행한다.

김헌의 건축에서 패러독스가 작용하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가장 직설적으로는 건축의 수평과 수직 요소, 벽과 바닥을 통해 읽을 수 있다. 누멘의 외관이 주는 첫인상은 불투명하다. 누멘의 외관에서 건물의 내부, 특히 수평의 바닥이 어디에 있는지를 거의 알 수 없다. 벽에는 큰 구멍이 뚫려 있지만 집 속의 살림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건물의 외관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바닥은 8m 높이에서 벽면 밖으로 돌출되어 있는 연못이다. 외관에서는 수직의 벽체가 지배한다. 건물의 구조는 거친 힘을 가진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하였다. 콘크리트 벽에 가는 수직 막대가 규칙적으로 반복하도록 벽면이 장식되어 마치 목조 구조의 모습이다. 튼튼하고 안정감을 주는 벽체의 모습이 아니다. 그 속에 사람이 살고 있을 것 같지 않은 방치된 폐가의 느낌, 돌보지 않은 건물처럼 마치 구조의 결함 때문인 것처럼 약간 기울어버린 모습이다. 누멘은 기울어진 헛간의 모습이다.

누멘의 마력은 수평 바닥 판을 다리와 연못으로 읽을 때 느낄 수 있다. 교각과 연못은 수평을 기본으로 하는 건축 요소이면서 공간을 나누고 장소를 만들어낸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교각은 강의 양안을 이어준다. 교각을 놓아 자연이 공간으로 나누어졌고, 사람이 다니는 길을 만들어 특정한 장소가 되었다. 갈라놓음으로써 이어주는 교각의 패러독스다. 바닥을 물로 채워 연못을 만드는 순간 발로 지나가지 못하는 수평공간이 생긴다. 물은 거울과 같이 하늘을 물 위에 비추어 깊은 수직 공간을 만들어낸다. 연못은 내가 들어가지 못하지만 나를 볼 수 있는 바닥 거울이다. 닫으면서 열어주는 연못의 패러독스다. 연못과 다리는 모두 정주를 위한 공간이 아니다. 잠시 멈추더라도 곧 어디론가 움직여야 하는 공간이다.

건축의 정령은 과정 자체에 있다
누멘의 바깥 벽을 지나 한 겹 안으로 들어가면 곳곳에 다리가 놓여 있다. 건물에 실제 다리 모양의 요소들이 있기도 하지만 입구 마당, 계단실, 복도, 옥상에서 이편과 저편이 느껴지고, 이곳과 저곳이 나누어지고 이어지는 건물이다. 계단실에서 복도의 열린 창을 통해 마당이 보인다. 화장실에서 계단실을 통해 옥상이 보인다. 한 공간이 언제나 다른 공간의 다리 역할을 한다. 출판도시 전체의 입장에서 이 건물은 그 자체가 하나의 다리와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멀리서 보았을 때 불투명한 오브제이면서 동시에 심학산과 한강을 이어주는 매개체다. 건물 뒤편 심학산 쪽에서 좁은 골목으로 벽을 열고, 한강으로 향한 전면은 커다란 창틀로 열어 입구 마당을 만들었다.

마당 한가운데 연못이 공중에 떠있다. 연못은 아래 마당에서 바라볼 때는 불투명한 조형이고 위에서 바라볼 때는 하늘에 열린 공간이다. 김헌에게 바닥은 수평의 벽이고, 그의 벽은 수직의 바닥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에게 바닥과 지붕, 교각과 연못은 벽처럼 공간을 열고 막기 때문이다. 건축의 본질적인 행위이다.

건축의 행위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이고 응축된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중은 문화예술의 여러 분야 중에서 건축을 가장 어려워하고 가장 멀게 느낀다. 일반인들이 건축에서 느끼는 거리는 건물을 짓는 데 동원되는 전문적인 공학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작은 살림집일지라도, 온전한 집 한 채를 잘 설계하기 위해서는 폭넓은 지식, 경험, 재능, 그리고 실천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건축은 세상 속에서 또 하나의 작은 세상을 만드는 어려운 과정이다. 지금 건축에 정령이 있다면 건축이 만들어지는 그 과정에 내재한다고 생각한다. 의미를 캐내고 만들어내겠다는 의지에서 출발하여 어렵지만 구체적인 과정을 통해 이야기도 그림도 아닌, 사람이 살 만한 집을 만든다는 것이 누멘의 마력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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