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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이회창 막판 개입에 ‘미디어 발전’ 역주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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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나라당 장광근 사무총장이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민주당 의원들이 미디어법 표결을 방해했다”며 한나라당의원석에 앉아 투표를 막고 있는 민주당 정세균 대표 등의 사진을 공개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수정안에 동의해주면 당론으로 채택하겠다.”

21일 밤 한나라당 안상수 원내대표의 제안에 의원들은 박수로 추인했다. 비로소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최종 수정안이 나온 것이다. 자체 수정안과 박근혜 전 대표의 제안, 자유선진당의 안까지 포함한 단일안이었다. 하지만 정작 다음 날 본회의에 상정된 법안은 또 달랐다. 21일 수정안에 대해 박근혜 전 대표가 다시 새 의견을 냈기 때문이다. 22일 미디어법이 최종 통과되기까지 이 같은 일은 비일비재했다. 전문가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정치적 고려 때문에 누더기 법안이 됐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고비마다 법안의 내용을 바꾸는 데는 주로 박 전 대표와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가 작용을 했다. 정치권에선 이들이 법안을 통과시킨 데는 일정 역할을 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법 개정 취지나 철학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일고 있다.

◆박 전 대표 한마디에 왔다 갔다=21일 한나라당의 최종 수정안이 나오면 박 전 대표는 공식적으로 찬성 의사를 밝히기로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깜깜무소식이었다. 대신 박 전 대표가 일부 조항에 불만을 갖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 나왔다. 나중에 확인된 박 전 대표의 불만은 방송 진입을 금지하는 신문의 기준을 ‘구독률 25%’에서 20%로 줄이자는 것이었다. 한나라당은 공개적으로 밝힌 수정안의 내용에 다시 손을 대야 했다.

어찌 보면 수치 하나만 바꾸면 되는 작은 사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번 법 통과 과정에서 박 전 대표의 개입으로 사실상 법의 전체 모습이 달라졌다는 게 정치권의 평가다. 박 전 대표는 지난 15일 ‘매체 합산 점유율 규제’를 자신의 대안으로 내놓았다. 이때만 해도 당내 전문가들은 “비현실적인 방안”이라고 넘겼다. 하지만 박 전 대표가 19일 “(본회의에) 참석한다면 반대표를 행사하기 위해 참석할 것”이라고 압박하자 사실상 ‘백기’를 들었다.

당내에선 여전히 비판적인 시각도 많다. 문방위원인 김효재·진성호 의원은 “여러 매체를 한 시장으로 보고 매체별 가중치를 계산하는 건데 이는 머릿속에서나 가능한 셈법”이라고 말한다. 다른 야당에선 “해법을 찾으면 노벨수학상을 받을 것”(창조한국당 이용경 의원)이란 얘기도 나왔다. 익명을 요청한 한 의원은 “박 전 대표가 아무리 공부했다지만 수년째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 우리보다 많이 알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개입 시기나 방식도 논란거리다.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를 중심으로 사실상 당론이 마련된 상황에서 문제 제기를 했기 때문이다. 문방위엔 박 전 대표의 대변인 격인 이정현 의원을 비롯, 홍사덕·이경재·한선교·허원제 의원 등 친박 성향 의원이 많았다. 박 전 대표가 사전에 얼마든 의중을 전달할 수 있었을 것이란 게 비판론의 요지다. 공식 라인을 통한 의사결정을 늘 강조했던 그가 협상 막바지의 돌출성 발언에 이어 수치 하나하나까지 정한 것을 두고 “원칙에 어긋난다”고 지적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근거도 제시 않는 지상파 지분 10%=이회창 총재는 신문과 대기업의 지상파 지분 참여 한도가 한나라당의 절반인 10%여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결국 관철시켰다. 그의 논리는 “한 번에 다 풀 수 없다. 일단 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왜 10%여야 하는지 근거를 딱히 제시하진 않았다.

여권에선 “여당의 안에서 무조건 나누기 2를 하거나 빼기 10%를 하는 게 대안이냐”며 “적당히 풀고 적당히 욕을 안 먹겠다는 방안”이란 불만을 제기했다.

전문가들은 “전례가 드문 10% 지분으론 주인 없는 방송이 될 게 뻔해 투자자들에겐 별 매력이 없다”며 “규제를 푸느라고 고생만 하고 정작 시장은 반응하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개정하면 된다지만 또 이 난리를 겪어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이상복·고정애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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