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프런트] 강호순 2심도 사형 … 납치범행 정류장 4곳 분석해 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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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울고법 형사3부는 23일 “재범 위험성이 큰 만큼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켜야 한다”며 강호순의 항소를 기각하고 1심과 같이 사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아직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다. 희생자들 가운데 버스정류장에서 실종된 4명은 어떻게 강의 차에 태워졌을까. 왜 목격자가 나타나지 않은 걸까. 셉티드(CPTED·범죄 예방을 위한 도시환경 설계) 전문가인 형사정책연구원 박경래 연구위원과 함께 현장을 찾아 버스정류장과 주변 환경의 문제점을 분석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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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오후 수원시 당수동 정류장. 2008년 11월 주부 김모(당시 48세)씨가 강호순의 차에 태워져 사라진 곳이다. 3개월 후 김씨는 야산에 암매장된 시신으로 발견됐다.

왕복 8차로인 수인산업도로에서 빠져나오는 도로와 접해 있는 이 정류장은 한적하다 못해 음산한 분위기였다. 정류장 앞쪽으로 멀리 아파트단지가 보였지만 산업도로에 의해 완전히 단절돼 있었다. 버스 여러 대가 무심하게 정류장을 빠르게 스쳐 갔다.

이영희(12·가명)양은 친구와 함께 안산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양은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곳이어서 무서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박 연구위원은 “대낮에도 충분히 납치가 일어날 수 있는 곳”이라고 지적했다. 강호순 사건 직후 경찰 초소를 설치했지만 무인 초소여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대생 연모(당시 20세)씨 실종 장소인 수원 금곡동 버스정류장은 삼거리에 위치해 행인들이 많고 버스도 자주 다녔다. 아파트 단지가 가까이 있는 데다 뒤편엔 상가건물이 있었다. 문제는 조경이었다. 박 연구위원은 “나무들이 시야를 가려 상가에서는 정류장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기 어렵다”며 “왕래가 잦은 곳도 범행 장소로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화성시 신남동 정류장에서는 2007년 1월 회사원 박모(당시 52세·여)씨가 실종됐다. 공장이 많은 도시 외곽에 위치한 이 정류장은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자주 다니는 길이 아니었다. 박 연구위원은 “버스가 언제 올 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근처에서 일하는 사람이 카풀을 해주는 것’으로 쉽게 생각하고 차에 탔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대생 안모(당시 21세)씨가 실종된 군포시 부곡동 정류장도 상황은 비슷하다. 덩그러니 서있는 표지판 하나만이 이곳이 정류장임을 알려준다. 정류장 인근에 사는 이모(64·여)씨는 “보건소의 주된 이용객이 주부와 노인들인데 언제 또 범행 대상이 될지 모른다”고 불안해했다.

수원 당수동 정류장 근처에는 강이 일하던 축사가, 군포보건소에서 멀지 않은 곳엔 강의 집이 각각 있었다. 피해자들은 모두 11월에서 1월 사이, 오후 3시와 오후 6시 사이에 강의 차를 탔다.

박 연구위원은 “이곳 지리에 밝은 강호순은 어디가 한적한 곳인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며 “겨울이라 빨리 따뜻한 차에 타고 싶은 피해자의 심리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대낮이라 남의 차를 탄다는 두려움이 크지 않은 점도 악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박 연구위원은 “경찰력에만 의존해서는 모든 범죄를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다”며 “정류장 앞에 차 턱을 마련하고 정류장이 보이는 쪽으로 과속 차량 단속 카메라를 설치해 감시효과를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문제의 버스정류장 네 곳 모두 버스정보시스템(BIS)이 설치돼 있지 않았다”며 “버스도착 시간 안내 장치만 있었더라도 도착 시간을 예상해 강의 차를 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정류장 위치를 정할 때도 외진 곳을 피하는 등 도로·교통 정책 수립에 있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강력범죄 가장 많은 장소는 길거리=살인·강도·강간·절도·폭행 등 강력 범죄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곳은 어디일까.

형사정책연구원 분석 결과 길거리가 범죄에 가장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1993년부터 2005년까지 길거리에서 일어난 강력 범죄는 600만 건에 육박했다. 상업·유흥시설 등 다른 장소에서 발생한 강력 범죄 건수를 모두 합해도 길거리 범죄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또 인구 10만 명당 범죄 피해자 수를 기준으로 중소도시가 대도시보다 범죄 발생률이 높았다. 강도 사건 피해자의 경우 서울과 6개 광역시 등 대도시에서 10만 명당 9명꼴이었다. 인구 40만 명 이상의 중도시에선 119명, 40만 명 미만의 소도시는 86명, 농어촌은 41명이었다. 치안서비스의 질이 높은 대도시와 달리 중소도시에 있어선 도로·교통 정책과 시설 개선이 시급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캐나다 앨버타주 에드먼턴시는 95년 ‘안전한 도시를 위한 디자인 가이드’를 마련했다. 이 가이드에 따르면 버스 정류장과 전철역 출입구는 거리와 인근 건물에서 잘 보여야 하고, 외진 곳에 있을 경우 유동인구가 많은 곳으로 옮기도록 하고 있다.

정류장에는 운행 스케줄을 알려주는 시스템과 비상벨·비상전화를 갖추고, 범죄에 이용될 만한 조경이나 건축물은 철거해야 한다.

글=박유미, 사진=김성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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