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타 만든 송승환, 그 난타 키운 이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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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난타’의 1년 매출은 150억원이 넘는다. 이광호 공동대표는 “승환이가 작품 구상할 때 나는 땅보러 다니고 극장 계약하고 다녔다”고 말했다. [PMC프로덕션 제공]

한국형 넌버벌 퍼포먼스 ‘난타’가 22일로 전용관 공연 1만회를 돌파했다. 당연히 한국 최초이자, 최다 공연 기록이다. 아프리카 공연까지 성사돼 ‘난타’는 전 세계 6대륙에 모두 진출한 첫번째 한국 공연물이 됐다. ‘난타’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인물은 송승환(52) PMC 프로덕션 대표다. 그런데 ‘난타’의 또 다른 공신이 있으니, 바로 이광호(52) 공동 대표다. “이대표가 안살림을 책임진 덕분에 ‘난타’가 롱런할 수 있었다”고 송대표는 전한다.

◆얼떨결에 발 들여놓은 공연산업=“말이 공동대표지 전 그냥 술상무에요.” 이 양반, 참 대략난감이다. ‘난타’의 재무·회계·마케팅 등을 지휘한다는 말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덩치도 크고 얼굴도 크다. 말은 느려터지고 “허허” 웃기 바쁘다. 아니, 이런 한가한 모습으로 깨알같은 숫자를 꿰맞출 수 있을까.

“1997년에 회계 정산결과 매출 4억원, 비용 10억원이었어요. 처음 흑자로 돌아선 건 99년이었죠. 매출 11억원에 비용 10억원….” 무른 겉모습과는 달리 그는 과거의 수치를 컴퓨터처럼 기억해 냈다.

이대표와 송대표는 서울 휘문고 67회 동창이다. 학창시절엔 그저 데면데면한 사이였단다. 사회에서 둘의 첫 관계는 채무였다. 96년 송대표가 뮤지컬 ‘우리집 식구는 아무도 못 말려’를 제작한다며 이대표에게 1억원을 빌려간 것. “그때만 해도 저에게 1억원은 그리 큰 돈이 아니었어요. 그냥 ‘친구 도와준다’는 마음으로 선선히 내줬죠.”

1억원이 큰 돈이 아니다? 여기서 잠깐, 이대표의 이력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대표는 충남방적 오너(故 이종성씨)의 세째 아들로 당시 충남방적 전무였다. 70, 80년대 국내 대표 섬유회사였던 충남방적은 한창때는 한 해 매출 4000억원에 직원이 2만여명에 이르는 대기업이었다.

채권·채무 관계였던 둘은 97년 아예 각자 1억원씩 돈을 내 ‘PMC프로덕션’을 차리며 ‘동업자’로 돌아섰다. 그해 ‘난타’가 만들어졌고, 99년 영국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대히트를 치며 ‘난타’는 용틀임을 하기 시작했다. 반면 이대표는 휘청거렸다. 97년 터진 IMF로 충남방적은 워크아웃에 들어갔고, 99년 은행채권단에 의해 이대표는 회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얼떨결에 공연에 발을 들여놓았는데, 어느샌가 제가 죽기 살기로 뛰어들고 있었던 거죠. 돌이켜보면 ‘난타’가 저를 먹여살린 겁니다.”

◆“난 영원한 아마추어”=“‘난타’를 만든 건 송승환이지만 ‘난타’를 키운 건 이광호”라는 게 공연계 중론이다. 2000년, 이대표는 10억원의 돈을 들여 ‘난타’ 전용관을 지었다. “한해 일본 관광객 250만명중 30분의1만 ‘난타’를 보러와도 손익을 낼 수 있다”란 계산을 깔고 승부수를 던졌다. 그리고 일본으로 날아갔다. 여인숙을 전전하며 일본 여행업자·정부 관계자를 일일이 찾아다녔다. 하급 공무원을 만나기 위해 1시간을 기다리다 허탕을 치기도 했지만 그는 악착같았다. 그해 관객의 절반 가량을 일본인들로 채우면서 ‘난타’ 전용관은 안정권에 접어들게 됐다.

제작 송승환, 경영 이광호로 구분된 PMC프로덕션은 공연제작사의 이상적인 모델로 꼽힌다. 이대표는 “제작자들은 ‘필’에 꽂혀 작품을 만들잖아요. 저처럼 숫자를 따지는 사람이 있어야 회사가 망하지 않죠”라고 말한다. “어설프게 작품을 분석하는 ‘전문가’의 함정에 빠지기 보다 ‘재미 있다’ ‘재미 없다’로 단순하게 보는 아마추어가 되고 싶다”란 말도 덧붙였다.

앞으로의 계획은 뭘까. 제2의 ‘난타’를 만드는 것? “3년 내에 회사를 상장시켜야죠. 현재보다 기업가치를 높여야 하고요. 싱가포르·홍콩 등에도 전용관을 만들 겁니다.” 역시 ‘난타’ 경영인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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