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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e칼럼

이탈리아 친환경 골프장 Verona GC

중앙일보

입력

베로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알프스에서 내려온 아티제 강이 수태극의 형상으로 이 도시를 감아 돌아 나간다. 거리는 깨끗하고 사람들은 친절했으며 볼거리도 많았다. 로마 콜로세움을 연상 시키는 원형경기장, 극장, 광장, 두오모 등 고대 로마 유적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그래도 핵심은 광장 한가운데 단테의 동상이 서 있는 시뇨리 광장과 줄리엣의 집(Casa di Giulietta)이었다. 줄리엣의 집은 대문에서부터 천정까지 온통 낙서 천국이었다. 전세계에서 몰려온 연인들이 자신들의 사랑의 서약을 곳곳에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빈틈없이 빽빽한 사랑의 서약들을 전세계 문자들의 향연이었다. 그 사랑들이 아직도 유효한 지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베로나가 글로벌 스펙의, 꽤 유명한 관광지라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베로나에선 먹거리도 잠자리도 그보다 행복할 수가 없었다. 베로나 외곽 시골길에 자리잡고 있는 elefante라는 호텔이었다. 글자의 생김새만 보아도 영어의 elephant를 짐작할 수 있었다. 호텔은 아담했지만 앤틱한 느낌의 방과 넓은 정원이 환상적이었다. 네온 간판을 비롯 실내의 각종 장식품도 모두 코끼리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이탈리아와 코끼리… 어울리는 구석이라곤 전혀 없는 매칭이었기에 사연이 궁금했다.

160cm나 될까 싶은 단신의 사장님은 백발에 한 쪽 다리와 눈에 장애가 있었지만 그 부지런함은 모든 직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수준이었다. 젊은 시절 프랑스 리옹에서 직공으로 일했던 그가 월급을 받으면 어김없이 찾아가던 레스토랑의 이름이 ‘코끼리’였다고. 가난한 시절 한 달에 한 번 맛 보았던 그 음식들은 그에겐 풍요의 상징과 같았을 것이다. 훗날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솜씨 좋은 주방장을 들여 그 맛을 복원하고 같은 이름의 호텔 레스토랑을 만들었다고 했다.

스파게티와 스테이크 맛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남편은 스파게티가 무슨 공기밥이나 되는 것처럼 한 접시를 더 추가 시켜 깨끗이 해치우는 기염을 토했고 직접 빚은 하우스 와인과 이탈리아 정통 맥주로 부어라 마셔라 하며 우리의 1박 계획은 자연스레 2박으로 늘어났다.

직원들도 친절하기 그지 없었다. 전날 밀라노 골프장에서 모기에 물려 오른쪽 발목이 거의 1.5배가 되어 있었는데 지배인 할아버지가 ‘모기가 아니라 뱀에 물린 것 아니냐’며 농담을 건내시더니 약상자를 가져와 직접 처치까지 해주셨다. 식당 아주머니는 서비스 음식을 내주셨고 마지막 날 체크아웃을 기다리고 계시던 사장님은 화이트와인 한 병을 선물해주시며 성공적인 여행을 빌어 주셨다.

그 사장님의 추천을 받아 찾아간 골프장 'Golf Club Verona'는 베로나 시내에서 서쪽으로 7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골프장은 시골 정서를 그대로 품고 있는 마을, 넓은 포도밭 옆에 자리잡고 있었다. 정통 이탈리아 스타일의 붉은 기와를 가진 석조 건물을 아이비 담쟁이들이 휘감고 있었다. 정원은 정갈했고 건물 내외부의 모든 문과 창은 아치형이라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했다. 클럽하우스 옆에 작은 집이 하나 더 있었는데 회원들을 위한 스포츠 시설로 수영장까지 갖추고 있다고. 무엇보다 베로나 GC는 농약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 관리 시스템으로 코스가 유지 되고 있었다. 클럽하우스 벽면엔 "Committed to Green"이라는 초록 깃발 모양의 친환경 인증마크가 자랑스럽게 걸려 있었다. 이는 유럽에서 친환경 유기농 경작지에 부여되는 공신력 있는 마크라고. 특히 골프장의 경우엔 이 인증서를 획득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

1963년 9 홀로 출발한 Verona GC는 2003년 개장 40주년을 기념하는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거쳐 현재의 공격적인 코스로 재탄생 했다. 특히 전반 9 홀은 나무가 무성해 페어웨이가 몹시도 좁았다. 그린은 벙커와 마운드로 둘러싸여 착시에 속도감마저 환상이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파3, 9번 홀은 깍아지른 듯한 업힐(140m)이었다. 언덕을 계산해 한 클럽 길게 잡았음에도 거리는 턱 없이 모자랐다. 그린에 미치지 못한 공은 갔던 거리의 반은 다시 굴러 내려오는 모양새였고 결국 파3에서 3온을 하는 불명예를 안았다. 그나마 후반 홀은 전반 홀보다는 페어웨이가 넓고 완만했지만 그 역시 호락호락한 구석이라곤 없었다. 18 홀을 시종일관 오르내리다보니 곱빼기 스파게티로 든든하게 채웠던 배도 쑥 꺼져 버렸다. 친환경이라 그런지 도마뱀을 비롯한 작은 동물들의 출몰이 잦아 18 홀 내내 비명 소리를 달고 다녔던 것 같다.

베로나 GC, 잘 관리된 골프장의 포스를 코스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고 직원들의 친절과 맛있는 레스토랑 음식은 코끼리 식당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주저했던 이탈리아 여정, 첫 날의 악몽, 좋지 않았던 과거의 기억들이 베로나를 통해 깨끗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베로나의 2박 3일은 우리의 위장과 자신감에 기름칠을 해 ‘다시 보는 이탈리아, 제대로 보는 이탈리아 여행’의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이다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