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DJ 訪日의 실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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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한달 앞두고 주요 부처 장관들이 여러 명목으로 도쿄 (東京) 나들이를 하며 일본 당국과 실무 협의를 하거나 각계에 걸쳐 탐색전을 벌이고 있다.

일본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그들의 관심사 가운데 핵심은 과거 역사 문제에 대한 일본인들의 인식과 대응에 관한 것이다.

두 나라의 경제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성격의 불황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50여년 전의 역사가 또 다시 현안으로 올려진 것은 시대의 아이러니다.

20세기말 마지막까지도 씻겨지지 않는 역사마찰의 불행이다.

金대통령이 새로운 세기를 맞기 위해 한.일 두 나라의 과거를 청산하자고 강조하고 있는 것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외교적으로 엄청난 부담을 안고 있다.

'청산' 은 특히 한국인들에게 일본의 잘못된 역사관을 바로 잡는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독일인의 역사 인식에 비추어 본다면 일본의 과거사 처리엔 언제나 시원한 것이 없고 언제나 분명한 것이 없다.

80년대 초반에서 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전두환 (全斗煥).노태우 (盧泰愚).김영삼 (金泳三) 씨 등 3명의 전직 대통령이 일본에서 한.일 수뇌회담을 갖고 일본 국왕도 만났으나 방일 (訪日) 의 본질과 명분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역사 문제 해결이라는 측면에서는 한국이 실패했다.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사과 내용은 한국이 기대하는 수준 이하였다.

만약 한국 정부가 이번에 '청산' 에 지나치게 무게를 둔다면 또 다시 실패의 게임에 빠질 우려가 있다.

지금의 오부치 게이조 (小淵惠三) 일본 총리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싸여 있다.

국내 경제는 최악이며 그의 인기는 밑바닥을 헤매고 있다.

집권 자민당의 힘있는 인사들이란 거의가 우익이다.

그들은 '천황의 신 (臣)' 으로 일컬어지는 관료에 의존하고 있다.

오부치 총리는 한국의 '청산' 요구에 응하기는 커녕 논의조차 하기 어려운 취약한 정치기반 위에 가까스로 서 있다.

자칫하다간 내각의 수명이 더욱 짧아질 수밖에 없다.

장쩌민 (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은 9월중 도쿄를 방문하기로 했다가 홍수피해를 이유로 일정을 취소했다.

그러나 실제는 과거역사를 반성하는 기틀 위에서, 두 나라 관계를 재정립하는 원칙을 규정하자는 중국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이번주초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엄청난 충격을 받은 오부치 정권은 더욱 극성스러워질 우익의 강성 기류에서 빠져나오기 어렵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 청산' 은 한국의 요구 수준 여하에 따라 양국간의 불필요한 긴장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호소카와 전총리에게 그러했듯 과거사에 대한 언급은 오부치 총리에게 맡기고 구체적 실행안은 실무선에서 다루는 것이 좋겠다.

한국은 심각한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한 엔화의 절대적 지원도 필요로 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이후 금융위기때 실질적으로 한국을 많이 지원해준 나라는 미국보다 일본이었다.

외환 위기 이후 단기에서 중기자금으로 전환된 외화 2백30억달러중 일본 자본은 전체의 33%, 미국은 18%였다.

그런데도 일본은 미국만큼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데 대해 섭섭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한.일간의 특수관계에서만 가능한 지원은 '역사' 와 '감정' 의 그늘에 가려져 축소평가되거나 무시됐다.

일본 정부는 올들어 한국에 수출입은행 자금 10억달러를 지원해 주었으나 한국은 이 자금의 20여%밖에 소화하지 못했다.

실물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탓이다.

한국측은 이 자금을 다시 30억달러로 확대 지원받는데 매달리고 있다.

방일의 성과로서 과시적 성격이 짙다.

80년대초 전두환 전대통령은 일본으로부터 40억달러의 경협자금을 받아왔으나 실제는 이의 절반도 사용되지 않았다.

새로운 한.일 관계 구축을 위해 일본과 협상을 벌일 때 '경제' 와 '역사' 중 어느 한쪽에만 우선순위를 둘 수는 없을 것이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주요 사안에 대한 속도를 조절하고 방법도 바꾸어 보아야 한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 보면 해답이 보인다.

어업협정 교섭도 감정의 벽을 넘어서 보다 실리적인 성과를 겨냥해야 한다.

한국은 일본 여론을 이끌어갈 준비를 해야 한다.

일본 각계 각층과 교류의 폭을 넓혀 한국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의 주요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대일 (對日) 마찰 요소를 사전에 해결하기 위한 노력 없이 오로지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한 것으로 미뤄버리는 관습을 타파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이다.

최철주(일본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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