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찬 알바 경력, 토익 고득점보다 낫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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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호 08면

서강대 김이삭씨(왼쪽)와 서울시립대 원새롬씨(오른쪽)가 17일 서울 종로구 연지동 두산아트센터에서 뮤지컬 입장객들이 촬영기기를 갖고 공연장에 들어가는지 검사하고 있다. 공연기획자가 꿈인 두 사람은 뮤지컬 공연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관련 경험을 쌓고 있다. 신동연 기자

‘알찬 알바’가 높은 토익점수보다 나을 수 있다. 때론 취업 스펙 가운데 가장 효자노릇을 한다.

취업 위한 ‘스펙용 알바’ 전성시대

한경대 행정학과를 나온 정승일(28)씨. 그는 지난해 4월 훼미리마트 경기도 안성지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정씨의 토익 점수는 750점. 학점은 3.8점(4.5점 만점)으로 평범한 수준. 그런 정씨가 보광 훼미리마트 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이 있다. 자기소개서에 훼미리마트에서의 아르바이트 경력을 적은 게 큰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훼미리마트에서 아르바이트했을 때 가설과 검증을 실천한 적이 있나요.”
정씨가 면접 때 받은 질문이다. 까다로운 질문이었으나 정씨는 당황하지 않았다.
“동반 진열로 매출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햇반과 같은 즉석식품 옆에 숟가락을 배열하면 고객들의 구매를 더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배열을 달리 해봤습니다. 그 결과 가설대로 동반 구매를 유발해 매출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직접 겪고 느낀 것을 토대로, 전형 과정에서 다른 지원자들과 차별화된 모습을 보인 정씨는 보광 훼미리마트 수퍼바이저가 될 수 있었다.

동국대 경주캠퍼스를 나와 니토덴코 코리아에 합격한 지동근(27)씨도 같은 경우다. 그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에 눈에 띄는 아르바이트 경험을 충분히 적어놓았다. 아르바이트에 대한 면접관들의 질문을 유도해 내려는 생각에서다. 23세 때 했었던 신세계 이마트 업무지원팀 아르바이트는 신세계에 요청해 등기로 경력증명서를 발급받아 면접날 제출했다. 자신의 아르바이트 경력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한 조치였다.

지씨의 작전은 효과가 있었다. “최종면접에 15명이 올랐는데, 저는 흔히 가장 낮게 평가하는 지방 사립대 출신이었지만 많은 알바 경력을 갖고 있었죠. 다른 분들은 모두 좋은 학교를 나왔지만 영업과 관련된 경력이 거의 없었어요.”

자연 면접관들의 질문이 지씨의 아르바이트 경험에 집중됐다. 직접 체험한 일이었던 만큼 지씨는 자신 있게 답변할 수 있었다.

“잠실야구장에서 많은 사람 앞에 서서 이 사람 저 사람 넘나들며 맥주를 팔았습니다. 그때처럼 한국의 삼성과 LG에 기술을 팔 자신이 있습니다.” 아르바이트 경험을 ‘영업’이라는 직무와 연결시킨 지씨는 결국 이 회사에 합격했다.

지원하려는 분야에서 경력 쌓아야
두 사람의 사례는 ‘알찬 알바’가 용돈벌이 이상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일단 아르바이트 경험을 통해 이력서나 자기소개서 등에 ‘영업력’ ‘기획력’ 등의 장점을 부각시킬 수 있다. 특히 자신이 취업을 희망하는 분야에서 직접 체험을 쌓으면 유용한 취업 스펙이 될 수 있다. 해당 분야에서의 실무경험담이 채용 담당자들의 눈길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아르바이트 하나를 하더라도 진로를 고려해 업종을 고르는 대학생들이 늘고 있다.

보통 ‘아르바이트’ 하면 단기간 근로를 뜻하지만 해당 분야에서 몇 년째 아르바이트를 계속하는 학생들도 있다.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2학년 김은정(20·여)씨는 문화재 연구원 유물정리실에서 유물관리를 돕고 있다. 그의 장래 희망은 유물발굴연구원이다. 김씨가 아르바이트로 하는 일은 자신의 장래 희망으로 가는 징검다리다. 그래서 김씨는 아르바이트를 2년째 계속하고 있다.

국민대 경영학부 2학년 이용(21)씨는 줄기차게 공공기관에서만 아르바이트 경력을 쌓고 있다. 그는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KEI)에서 통계조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근로복지공단에서 4대 보험 안내전화 아르바이트를 했고, 은평구청에서도 일했다. 이씨가 공공기관에서만 아르바이트 경력을 쌓는 데는 이유가 있다. 공기업에 들어가기 위해서다. 그는 “꾸준히 오랜 기간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면 언젠간 경력으로 인정돼 취업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아르바이트를 오래하다 정직원으로 신분이 바뀐 경우도 있다. 한국리더십센터 컨설팅그룹 선임연구원 김진규(28)씨는 과거 이 회사 서류전형에서만 네 번 낙방했다. 네 번째 탈락 후 김씨는 회사로부터 아르바이트 제안을 받았다. 그는 “오래 꿈꿔온 곳이라 ‘몸이라도 담글’ 생각으로 받아들였다”고 했다. 이후 1년여를 열심히 근무한 결과 마침내 정직원인 선임연구원으로 채용됐다.

지동근씨는 “인턴을 하면 가장 좋겠지만 인턴이 되기 힘들다면 알바를 하는 것이 좋다”며 “이왕이면 과외처럼 돈은 되지만 경력이 되지 않는 알바보다는 경력이 되는 알바를 하라”고 조언했다.

대학원 이상도 ‘알바 자리 구합니다’
아르바이트란 말은 사실 법적인 용어가 아니다. 법적으론 아르바이트란 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현행법상으론 근로기준법상의 ‘단시간 근로자’(주 36시간 미만 근로)가 아르바이트생에 가까운 개념이다.

법적으로 아무런 보장이 되어있지 않은 탓에 아르바이트생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예도 많다. 취재팀이 아르바이트 구직사이트 ‘알바몬’에서 ‘시급(時給)을 협의합니다’라고 표시한 업소 8군데에 전화를 해봤더니 최저임금(4000원)에 미달되는 곳이 5곳이나 됐다. 최저임금 미만의 시급을 지급하는 업소는 대개 편의점이나 PC방이었으며 3500~3700원 정도를 지급한다고 했다.

최저임금 미만의 시급을 주는 이유는 아르바이트생에게 수습기간을 지정해 놓고 임금을 지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 업무인 데다 대부분의 학생이 방학 중 단기간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은데도 수습기간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르바이트 희망자들이 불합리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자리’보다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 고용시장의 규모는 눈에 띄게 커지고 있다. 아르바이트 구인구직 전문포털 ‘알바천국’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기 위해 이력서를 낸 사람은 무려 13만1557명.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0% 정도 늘었다.

이들 가운데는 대학 재학생뿐 아니라 졸업생, 대학원 출신들이 많다. 알바천국 측이 이력서를 분석한 결과 아르바이트 희망자 가운데 대학 졸업생이 29%(3만8140명)였다. 석사급 이상도 636명이나 됐다.

5월 한 달 동안 고학력자 아르바이트 신규 등록률도 높아졌다. 대학 졸업자들은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72%, 대학원 이상은 41% 늘었다. ‘고학력 취업난’을 반영한 것이다.

한국노동연구원 황수경 박사는 대학을 졸업한 아르바이트생을 ‘비자발적 단시간 근로자’라 정의하고 있다. 또 다른 곳으로의 취업을 원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황 박사는 “대학 재학생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은 전문적인 영역에서 경험을 쌓고 경제관념을 키울 수 있는 좋은 현상이지만 졸업생이나 취업준비생들이 취업을 못하고 ‘비자발적 단시간 근로자’로 남는 것은 인적 자원의 낭비이자 사회적으로도 큰 손실”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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