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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외자 유치 조급증 유감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23호 34면

이명박 대통령이 유럽을 순방 중이던 지난 12일 청와대와 방송통신위원회가 보도자료를 냈다.

나현철 칼럼

“스웨덴의 세계적 정보기술(IT) 회사인 에릭슨이 앞으로 5년간 한국에 15억 달러(2조원)를 투자해 연구개발(R&D) 센터를 설립하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15억 달러’가 포함된 문장은 굵은 글씨로 강조돼 있었다. “에릭슨의 그린 네트워크 기술과 한국의 IT 환경이 결합돼 4세대 이동통신 시장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란 청와대 관계자의 설명도 따라붙었다.

하지만 14일자 파이낸셜 타임스에 에릭슨의 한국지사 대표 인터뷰가 실리면서 소동이 벌어졌다. 그가 “한국 정부의 발표에 놀랐다. 베스트베리 에릭슨 회장이 이 대통령과의 만난 자리에서 이런 약속을 하지 않았다”며 정부 발표를 부인해 버린 것이다.

청와대는 부랴부랴 해명자료를 냈다. “12일 면담에서 구체적인 투자 금액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아주 근거 없는 수치는 아니다”는 요지였다.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과 베스트베리 회장이 전날 만났을 때 한국 측 실무자가 투자 금액을 묻자 “시장 상황에 따라 15억 달러도, 20억 달러도 될 수 있다”는 답을 들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대략적인 투자 예상 규모를 적시했다는 게 청와대의 해명이다. 에릭슨도 같은 날 입장 발표를 통해 “투자계획에 대해 한국 정부와 완벽한 이해와 합의를 했다”며 사태 진화에 나섰다. 그러면서도 “정확한 투자 일정과 규모는 앞으로 진행될 프로젝트에 따라 결정될 예정”이라고 선을 그었다. 어쨌거나 15억 달러라는 액수는 결국 한국 정부의 ‘희망사항’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한국 정부와 에릭슨 간의 진실게임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섣부른 발표 하나가 한국 정부의 신뢰를 안팎에서 떨어뜨리고 국제 망신을 자초했다. 주식시장에서도 관련 주식이 급등했다 급락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투자하기로 했다는 것만으론 뭔가 허전해, 합의되지 않은 숫자 하나를 끼워 넣었다가 벌어진 일이다.

문제는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대대적인 ‘외자유치’로 선전됐지만, 알고 보니 사실이 아니거나 용두사미였던 게 적지 않았다. 외환위기 직후인 1997년 말 전라북도는 세계적인 팝가수 마이클 잭슨이 무주리조트를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2004년 10월 정부는 마이크로소프트ㆍHP 컨소시엄과 인천 송도경제자유구역 안에 10억 달러 규모의 지식정보산업단지를 구축하기로 하는 양해각서(MOU)를 맺었다. 하지만 몇 달 뒤 투자가 실행하지 않으면서 모두 유야무야 돼버렸다. 협의도 끝나지 않았거나 구속력이 없는 각서 한 장 만들어놓고 정식 계약으로 과대포장한 것들이다.

실제 투자가 이뤄져도 속 빈 강정인 경우도 많았다. 2003년 8월 세계 반도체업계 선두 주자인 인텔의 회장이 방한에 맞춰 한국에 종합R&D센터를 세운다는 계획이 발표됐다. 당시 정부는 “인텔이 동북아 시장 공략을 위해 200억 달러 규모로 설립할 예정인 아시아 반도체 생산라인을 국내에 유치하는 데도 유리할 것”이라며 기대를 잔뜩 부풀렸다. 하지만 이 센터는 2004년 3월 디지털홈 분야의 소규모 연구센터로 문을 열었다가 3년 뒤 별 필요가 없다는 본사의 판단으로 폐쇄됐다. 지멘스ㆍ모토로라ㆍ오라클ㆍAMD 등도 정부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R&D센터를 열었다가 3~4년이 채 안 돼 문을 닫았다.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외국 기업의 R&D센터도 영업지원 부서를 R&D센터로 포장하거나 직원이 10명뿐인 ‘무늬만 R&D센터’가 적지 않다. 생색을 내고 싶은 기업과 성과를 자랑하고 싶은 정부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외자 유치는 좋은 일이다. 돈이 들어와 고용이 늘고 경제 성장을 촉진한다. 경쟁이 활성화돼 소비자의 선택권이 넓어지고 국내 기업의 체질도 튼튼해진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의 개방도가 높아지면서 외자유치는 더 절실해졌다. 역대 정부도 한국의 장점을 널리 알리며 적극적으로 투자를 유치하는 데 적지 않은 힘을 쏟아 왔다. 외환위기를 빨리 극복하고 수출과 산업 경쟁력을 높이는 데도 외자라는 ‘메기’가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과대포장은 이제 그만둘 때가 됐다. 실익도 없고 신뢰도 잃기 십상이다. 공을 과시하고 싶은 실무진 몇몇에겐 이로울지 몰라도 정부와 기업, 국민에겐 부담으로 돌아온다. 이번만 해도 ‘15억 달러’라는 문구 하나로 잃은 게 너무 많지 않은가. 규제를 완화하고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정공법 외엔 외자 유치의 왕도가 있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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