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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정부 차원 '탈북자 실태' 조사를

중앙일보

입력

탈북자의 대규모 입국 사태는 정부와 민간의 대응능력을 평가하고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시험대가 되고 있다. 탈북자 업무는 1997년부터 통일부가 담당하고 있다. 통일부가 탈북자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것은 통일 대비 차원에서 체계적인 준비와 훈련에 적합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의 탈북자 수용과 지원체계는 통일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 차원보다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급급하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탈북자 관련 정책이 중장기적으로 제시되지 못하는 이유는 이들의 입국 규모에 대한 예측성이 매우 낮기 때문으로 보인다. 탈북자는 1990년대 초반까지 연간 10명 이내에서 99년 100명을 넘은 뒤 2002년 최초로 1000명을 넘어섰다. 이와 같은 탈북자의 급격한 증가는 탈북자 조사 및 사회적응시설과 인력에 대한 적정 수준의 유지를 어렵게 했다. 결국 정부는 입국 규모에 대한 불확실한 정책 자료를 근거로 수용시설을 유지하고 있으며, 현재와 같은 일시적 대규모 유입의 경우 일회성 대책으로 대응하고 있다.

현재 재외탈북자는 잠재적 한국 입국 대기자들이다. 그러므로 재외탈북자의 규모, 성별 분포, 한국행 희망 수준, 연령 분포 등에 대한 기초 실태조사를 정기적으로 했다면 탈북자의 수용과 지원에 대한 논란은 대부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90년 중반 이후 민간단체와 연구자들은 해외 현지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향후 입국 예정 규모와 성별, 연령 분포를 제시해 왔으며 그 결과는 입국자에 대한 정부의 조사 결과와 같은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정부는 민간단체와 연구자들의 조사 결과를 신뢰하지 않았으며, 정부 차원의 해외 실태조사를 요구하는 민간단체의 주장도 해외 관련 국가와의 외교적 갈등을 이유로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재외탈북자에 대한 객관적인 실태조사가 되지 않는다면 향후 입국 규모는 물론 입국자의 성별, 연령, 기대수준, 그리고 단기간 대규모 유입 가능성 등에 대한 대책을 수립할 수 없다. 정책 수립을 위한 기초 통계자료가 미비한 상황에서 통일에 대비하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대책을 수립하는 것은 저효율과 고비용 구조를 초래할 뿐이다.

그러므로 정부는 일시적 대규모 탈북자에 대한 수용대책뿐 아니라 중장기적인 대책 마련에 집중해야 한다. 탈북자 중장기 대책 마련의 첫 출발은 중국과 러시아.몽골.동남아 지역에 체류하고 있는 재외탈북자에 대한 실태조사가 돼야 한다. 실태조사는 정부와 민간단체.연구자가 역할을 분담한다면 정부가 우려하는 외교적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재외탈북자에 대한 인권침해 상황이 국제적으로 이슈화하고 있으며, 미국 하원에서 통과된 '북한인권법안'은 재외탈북자의 인권 개선을 주요 의제로 포함하고 있다. 북한인권법안이 통과될 경우 재외탈북자의 미국 입국은 물론 한국행 희망자가 급증할 것으로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와 관련, 여당 일부 의원은 북한인권법안의 저지를 요구하고 있으며, 한국 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러한 저지 요구와 침묵은 북한과의 관계를 우선하는 입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나 재외탈북자들의 심각한 인권침해 상황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을 것이다.

북한 주민들이 중국으로 탈출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중국에 체류하는 탈북자들이 목숨을 걸고 동남아 지역으로 이동해 한국행 전세기에 탑승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절박한 현실이 정부 차원의 객관적 실태조사 보고서를 통해 제시돼야 한다. 미국의 북한인권법안이 재외탈북자와 한국 입국자 규모에 미치는 영향과, 향후 탈북자 문제의 전개 방향에 대한 해답은 미국과 중국.남북한 정부가 아닌 재외탈북자와 북한 주민들의 마음속 판단에 좌우될 것이다. 남북한과 중국은 탈북자 발생과 한국 입국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있는 정책적 수단이 미비한 상황이며, 탈북자와 북한 주민들이 생사를 걸고 탈북과 한국행을 희망한다면 우리는 수용 이외에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윤여상 북한인권정보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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