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날도 점거당한 국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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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제헌국회에서 의원들께서 밤을 새워가며 토론하고 지혜를 모으려 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에 비하면 오늘 우리 모습은 어떤지 심각하게 반성한다.”(민주당 정세균 대표, 확대간부회의)

61번째 제헌절을 맞은 17일 국회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자성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러나 말뿐이었다. 사상 초유의 국회 본회의장 여야 동시 점거는 이날도 계속됐다. 비록 여야 의원 2~3명씩만 ‘보초’로 남기는 ‘휴전’ 모양새를 취하긴 했으나 전격적인 농성 해제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61주년 제헌절 기념식이 17일 국회 중앙홀에서 열렸다. 앞줄 왼쪽부터 양승태 중앙선거관리위원장, 한승수 국무총리, 이강국 헌법재판소장, 이용훈 대법원장, 김형오 국회의장, 정래혁·이만섭·김수한·박관용 전 국회의장. [김상선 기자]

◆제각각 제헌절=로텐더홀에서 열린 제헌절 기념식에는 한승수 국무총리와 헌정회 임원, 제헌의원 유족 등이 참석했다. 김형오 국회의장은 “1년 365일 중 320일 이상을 밤낮으로 일하며 새 조국을 위해 열정을 바치신 제헌의원들께 참으로 송구스럽기 그지없다”며 “18대 국회처럼 문을 열기도, 법안을 상정하기도 어려운 국회는 일찍이 없었다. 여야 모두 제헌 정신을 이어받아 국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날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는 기념식에 불참했다. 여야가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하는 모습에 자괴감이 든다는 이유였다. 그는 당 회의에서 “제헌국회가 헌법을 만든 오늘 국회의원들이 본회의장을 점거하는 것은 이유야 어떻든 헌법을 모독하는 행위”라며 “스스로 제헌절을 축하할 자격이 있는지 자괴심이 차오른다. 무슨 염치로 나가느냐”고 했다.

야 4당(민주당·민주노동당·창조한국당·진보신당) 대표들은 의원회관에 모여 “국회의장은 언론 악법 직권상정, 개헌 생각을 버리고 국회를 정상화하라”고 주장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의원총회를 열었으나 각각 남부 지역 수해와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입원 등으로 어수선했다. 안상수 원내대표는 의총에서 미디어법 처리와 관련, “‘표결처리를 전제로 회기를 31일까지 연장하자’는 김형오 의장의 중재안을 민주당이 거부해 협상이 원점으로 돌아갔다”며 “헌법과 국회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표결처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말했다.

◆국회 온 대학생, “국회 안 믿는다”=이날 김수한·박관용·정래혁 전 국회의장은 기념식이 끝난 후 본회의장을 둘러봤다. 이때 본회의장을 점거 중이던 한나라당 신성범·원희목·성윤환, 민주당 박은수·홍영표 의원은 의원휴게실로 몸을 숨겼다. 김수한 전 의장은 “시스템은 좋아졌는데 왜 싸우는 것은 60년대냐”고 꼬집었다.

국회 예결위회의장에서는 제1회 국회의장배 전국 대학생 토론대회가 개헌을 주제로 열렸다. 사회는 시사평론가 정관용씨, 심사위원은 한나라당 김성식·강용석·이주영, 민주당 전병헌 의원 등이 맡았다. “국회의원이 대학생 여러분에게 배우겠다는 자세를 나타낸 것”이라는 정씨의 설명에 한 학생은 “국회를 믿지 않는다. 국회가 제 기능을 못하고, 민주주의의 기본원리가 흔들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글=백일현·선승혜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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