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러는지 나도 몰라 채 놓고 한달쯤 쉬고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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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비앙 마스터스 대회가 끝난 뒤 주위의 권유로 나들이에 나선 박세리의 표정이 썩 밝지 못하다.로잔으로 향하는 레만호 뱃전에서=정제원 기자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골프채를 놓고 어디 가서 한달쯤 푹 쉬다 왔으면 좋겠어요."

박세리는 지쳐 있었다. 에비앙 마스터스 3라운드가 끝난 23일 저녁. 스위스 접경지역인 프랑스 에비앙 시내의 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그는 겉으론 웃었지만 억지로 울음을 참는 듯했다.

내가 봐도 황당한 샷

"드라이브샷은 왔다갔다 하고…. 제가 생각해도 황당한 샷이 나와요."

그날 박세리는 오비(OB.아웃 오브 바운스)를 두개나 내면서 9오버파 81타를 쳤다. 80대 타수는 지난해 7월 US여자오픈 4라운드(82타) 이후 처음이다.

스테이크 자르던 손을 멈춰가며 박세리의 푸념은 계속됐다. "믿어지지 않아요. 처음부터 다시 해봤으면 좋겠다니까요."

박세리의 열성팬인 재미 사업가 남모(69)씨 부부가 격려해 주려고 마련한 식사 자리였다. 언니 유리(32)씨도 동행했다. 하지만 분위기는 냉랭했다. 방금 전 박세리는 '무서운 아버지' 박준철(53)씨에게서 국제전화로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남씨가 말을 꺼냈다. "박 프로, 살다 보면 이럴 때도 저럴 때도 있는 거야. 그렇다고 만날 호텔 방에만 처박혀 있으면 쓰나."

박세리는 19일 현지에 도착한 뒤 나흘간 골프장 말고는 호텔 바깥에 나간 적이 없었다. 저녁 식사는 거르거나 후원사인 CJ 측이 준 햇반으로 때웠다고 했다. "밥맛도 없고요. 뭐 특별히 먹고 싶은 것도 없어요. 다른 선수들처럼 시내에 관광 나갈 기분도 아니고…."

턱수술 얘긴 헛소문

박세리의 슬럼프는 벌써 두 달이 넘었다. 5월 10일 미켈롭 울트라 오픈 우승으로 골프 명예의 전당 입회 자격을 얻은 직후부터다. 5월 말 사이베이스 클래식과 6월 초 켈로그-키블러 클래식에선 컷오프 탈락했다. 그 뒤 스물네번의 라운드에서 60대를 친 건 네번뿐. 당연히 10위권 근처에도 못 갔다(에비앙 마스터스에선 출전 선수 77명 중 68위를 했다).

한국에선 "박세리가 예뻐지려고 턱 깎는 수술을 했다" "이젠 골프보다 외모에 신경 쓴다더라" "겨울 훈련을 게을리 했다"는 등의 소문이 나돌았다. 박세리는 "성적이 안 좋을 때마다 나오는 헛소문"이라고 일축한다.

대회가 끝난 24일 박세리는 언니와 함께 배를 타고 레만호를 건너 스위스 로잔으로 나들이에 나섰다. 마지못해 따라나선 발걸음이었다. "이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오랜만에 나오니 기분은 좋네요."

박세리는 밥 먹을 때도 골프, 잠잘 때도 골프만 생각하며 살아왔다고 했다. 골프 외의 삶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고 했다. 우승해도 공식 기자회견 외엔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다.

배가 로잔에 닿았다. 박세리는 언니 유리씨의 손에 이끌려 쇼핑에 나섰다. "이거 되게 싸다, 얘."

유리씨가 기분을 풀어주려고 했지만 박세리는 보는 둥 마는 둥 지나쳤다. 유명 브랜드 옷가게도 몇 군데 있었지만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다시 시작해 봤으면

아니카 소렌스탐(스웨덴)의 아성을 흔든 박세리가 이토록 부진한 이유는 뭘까. 4년째 그의 캐디를 맡고 있는 콜린 칸(영국)은 이렇게 얘기했다.

"멘털(정신)이 80%, 스윙이 20%쯤 될 거다. 스윙이 크게 달라진 건 없는데 자신감이 없어져 드라이브샷이 왔다갔다 한다. 그러면서 더 자신감을 잃는 것 같다. 그러나 세리는 펀더멘털(기초)과 체력이 튼튼하다. 곧 이전의 스윙을 회복할 것으로 믿는다."

에비앙.로잔=정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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