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방어적 민주주의' 아시나요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올해는 유난히 헌법이란 말이 자주 회자(膾炙)된다. 이런저런 정치적 분쟁들이 헌법문제로 옮아가는 일이 잦아졌다. 대통령 탄핵파동에 이어 최근에는 수도 이전 문제까지 헌법을 둘러싸고 다투어지고 있다. 이제 헌법재판소는 한가한 곳이 아니다. 이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다툼이 많은 것이 좋을 리야 없지만, 정치적 다툼이 법적 다툼으로 전화(轉化)되는 것에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민주적 제도들이 실제로 작동된다는 얘기이고 법의 지배가 확산된다는 증좌가 아닌가. 일찍이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란 책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는 거의 모든 정치문제가 조만간 사법적 문제로 처리된다." 그가 살아 지금 한국을 찾는다면 같은 말을 할지 모른다.

*** 헌재 제소 느는 건 긍정적 측면도

우리 헌법은 전문에 이어 본문 130개조, 부칙 6개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조항들의 밑바탕에 깔린 기본원리를 한마디로 줄이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보장'이다. 헌법 전문에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라는 구절이 나온다. 또 제4조는 이렇게 말한다.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이어서 제8조의 정당조항에는 이런 규정이 있다.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될 때에는 정부는 헌법재판소에 제소할 수 있고, 정당은 헌법재판소의 심판에 의하여 해산된다'. 여기서 '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그 뜻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동일하다고 보는 해석이 일반적이다. 이렇게 헌법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말이 쓰이는 것은 세 곳뿐이지만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보장은 우리 헌법 전체를 관통하는 최고 원리라고 보아 마땅하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란 무엇인가. 1990년 4월 국가보안법 제7조의 '찬양 고무 동조' 처벌조항의 위헌 여부가 문제됐을 때 헌법재판소는 이런 논지를 펼쳤다. 우선 이 조항은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해악을 줄 명백한 위험성이 있는 경우에 적용되는 것'이라고 밝힌 다음 이렇게 말한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준다 함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본적 인권의 존중, 권력분립, 의회제도, 복수정당제도, 선거제도,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골간으로 한 경제질서 및 사법권의 독립 등 우리의 내부체제를 파괴, 변혁시키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헌재 결정문의 이 부분은 분단 시절 서독 연방헌법재판소가 독일 공산당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판결문을 거의 그대로 따온 것이다. 그러면서도 서독 판결문과 달리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요소로 파악한 점에서 주목되는 결정문이다.

독일 헌법이나 우리 헌법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반하는 정당을 허용치 않는 점, 그리고 독일의 정치형법과 우리의 국가보안법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침해를 처벌하고 있는 것은 바로 '방어적 민주주의' 또는 '투쟁적 민주주의' 사상의 표현이다. 민주주의 제도가 민주주의 파괴 수단으로 악용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자유의 적과 싸우겠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라고 하여 아무 가치관이나 수용하는 가치상대주의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적에게 자유를 파괴하는 자유를 줄 수 없다는 사상이다. 바로 이 점이다.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는 그냥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의 적과 싸우는 투쟁적 자유민주주의다.

*** 과거 행적에 대한 말싸움은 피곤

가뜩이나 무더운 날씨에 느닷없이 따분한 헌법 강의를 늘어놓은 까닭을 헤아려 주시기 바란다. 한나라당 대표가 국가 정체성 문제를 제기한 데 대해 대통령은 이렇게 응답한 것으로 전한다. "헌법에 담긴 사상이 내 사상이라 더 할 말이 없다." 나는 대통령의 이 말을 그대로 믿는다. 다만 간첩의 전향 거부를 민주화운동이라고 강변한 의문사규명위원회에 대해 말을 아끼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더구나 이 논의를 과거 행적에 관한 말싸움으로 끌고 가는 것은 국민을 피곤하게 만든다. 오직 앞만 보고 걷자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정치는 뒤를 보고 싸우느라 정신이 나간 모습이다.

양 건 한양대 교수.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