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위기가 오는 소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위기는 위험과 기회의 합성어로 곧잘 통용된다.

상황은 위태롭지만 전화위복 (轉禍爲福) 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깔고 있다.

같은 말이지만 영어의 'crisis' 는 이보다 한결 동적 (動的) 이고 역학 (力學) 이 실려 있다.

서로 물고 물리는 사건전개의 흐름 속에서 앞으로 더 나빠질 수도, 더 좋아질 수도 있는 중대한 고비국면을 가리킨다.

위기를 이렇게 정의 (定義) 한다면 우리경제는 지금도 위기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

외채 상환을 뒤로 미루고 외환보유고부터 늘려 부도위기를 넘겼을 뿐이다.

환율과 금리가 상대적으로 안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수출증가율은 석달 내리 마이너스고 실물경제는 바닥을 모르고 가라앉고 있다.

종합주가지수는 300선에서 저공비행중이고 당국이 공식집계하는 실업자수는 1백65만명을 넘어섰다.

구조조정은 계속 머뭇거리고 외국인의 신뢰는 낙관을 불허한다.

당장 불똥이 떨어지거나, 허둥지둥. '우르르' 하는 패닉 (심리적 공황상태) 까진 가지 않아 우리 모두가 위기에 둔감해져 있을 뿐이다.

위기의 '급류' 를 형성하는 불길한 동인 (動因) 들, 즉 모멘텀은 도처에서 들먹거린다.

최근 방한한 미국 헤리티지재단 회장 에드윈 풀너2세는 본지와의 인터뷰 (25일자 19면)에서 현재의 한국경제는 "한마디로 적색신호상황" 이라고 진단했다.

"김대중 (金大中) 정부 초기만 해도 파란불의 기대가 컸었지만 5월을 고비로 황색신호로 바뀌었고, 이제는 빨간불 앞에 멈춰선 안타까운 상황" 으로 비유했다.

투자자문회사 자딘 플레밍은 최근 "한국경제는 증권과 원화가 폭락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걸어갈 가능성이 있다" 고 경고했다.

현대자동차 파업사태의 해결방식이 대외신뢰를 떨어뜨리면서 국제금융시장에서 한국채권의 투매 (投賣)가 빚어지고 외국언론들의 '한국때리기' 가 다시 시작됐다.

개혁방향은 옳지만 진행속도가 너무 느리다.

게다가 정치논리가 발목을 잡고, 집단이기주의로 고통분담이 잘 안된다.

시장원리를 왜곡하는 '신관치 (新官治) 주의적' 행태가 되살아나 곳곳에서 혼돈과 혼선을 빚고 있다는 것이 우리 경제에 대한 바깥의 현실인식이다.

외국사람들의 허튼소리라고 흘려버릴 수도 없다.

외국의 전주 (錢主) 들이 등을 돌리고, 빌려준 돈을 회수하려 들면 도리없이 두 손을 들어야 한다.

외채상환이 몰리는 계절, '10월 위기설' 도 이 때문이다.

위기의 갈림길, 소위 변곡점 (變曲點) 은 구조조정이다.

구조조정은 그 성격상 가혹하다.

안하면 몰라도 어차피 한다면 가차없이, 그리고 신속하게 해치워야 한다.

기업들은 죽었다 살아나는 고통을 겪어야 하고, 정리해고와 대량실업을 일정기간 사회 전체가 견뎌내야 한다.

대처 총리하의 영국도, 80년대 미국산업의 구조조정도 그랬다.

과도한 부채, 과잉설비와 과다고용 과다임금의 고비용.저효율체제에 대한 정공법은 싫든 좋든 구조조정밖에 없다.

재계가 머뭇거리고, 노조가 반발하고 대량실업에 따른 사회불안을 의식한 나머지 정부당국부터 흔들리면서 위기를 키우고 있다.

현대차 사태 해결은 정부와 정치권이 법과 원칙을 흔들며 결과적으로 기업들 정리해고에 현실적 한계를 그어놓았다.

분사 (分社) 화 등이 대안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이들은 구조조정이라기보다는 '가지치기' 에 가깝다.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하자는 전문가들의 주장들도 끈질기다.

그러나 돈이 풀려도 제대로 돌지 않고 은행권으로 되돌아간다.

돈을 풀기에 앞서 돈이 흐르도록 물꼬를 터놓아야 한다.

그러려면 한계기업과 부실기업을 정리하고 살아남을 기업들에 돈이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구조조정이 앞서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섣불리 돈을 풀면 한계기업들을 연명시키고, 대기업들의 구조조정도 도리어 지연시킨다.

우리 경제는 지금 불황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죽느냐 회생하느냐의 위기속에 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다.

'어떻게 되겠지' '버티면 내년쯤 나아지겠지' 하는 막연한 낙관론들이 위기를 재촉한다.

이 상황에서 위기관리능력이 곧 지도력이다.

법질서와 시장원리에 입각해 일관성과 일체성.투명성을 갖고 강하게 밀어붙일 수밖에 없다.

인기와 눈치, 다른 경제외적 고려는 초월해야 한다.

역대정부치고 이런 '악역 (惡役)' 도 없다.

'한국의 대처' 만이 위기를 잠재우고 우리 경제를 갱생으로 이끌 수 있다.

변상근(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