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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위석 칼럼]양파모양의 우리 경제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지금 한국이 앓고 있는 경제병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양파처럼 여러 켜로 이뤄졌다는 점이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우리는 한 꺼풀씩 다른 국면을 발견해 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각 꺼풀은 옹근 양파 한개를 형성하는 부분으로서, 그리고 이 경제병의 각기 다른 증상으로서 이 병마 안에 발병 초기부터 모두 갖춰져 있었다는 것도 차츰 깨달아 가고 있다.

97년 말의 외환위기가 결코 가장 먼저 나타난 본격 증세는 아니었다.

95년부터 어음부도율이 종전 평균보다 무려 5배로 늘어났다.

기업도산이 잇따랐다.

96년에는 대규모 경상적자가 나타났다.

이 적자는 97년엔 96년의 두배 속도로 빨라졌다.

경제학자들은 병명을 '고비용 저효율' 이라고 진단했다.

진단은 올바르게 해놓고도 정부와 전문가들이 그것이 가진 다급함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너무도 큰 불행이었다.

기업가들만은 위기를 절박하게 느끼고 있었으나 설마 그것이 '환란 (換亂)' 이라는 켜로서 곧 드러나게 돼 있는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설령 알았다고 해도 속수무책이었을 것이고 때도 이미 늦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환란은 고비용 저효율의 그냥 일부였다.

환란이 정작 터지고 난 뒤에는 그 급박성에 묻혀 고비용 저효율이란 병명 자체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환란치료를 위해 모든 힘을 쏟았다.

환란을 극복하면 병은 반이 아니라 거의 다 낫는 줄 알았다.

올해 6월을 지나면서 원 - 달러 환율은 내려가서 환란 전의 9백원대보다 4백원이 오른 1천3백원대에 와 있다.

차츰 이자율도 환란 이전 수준으로 떨어졌다.

그 사이에 외채가 더 늘어나지도 않았다.

환란이란 말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이 환란을 일단이라도 넘긴 것은 김대중 (金大中) 정부의 공적이다.

그러나 환란을 넘긴 다음에도 한국경제의 양파형 병마는 옹근 그대로 위세를 떨치고 있다.

지금 국면은 고 (高) 마이너스 성장과 고실업 켜다.

이 국면을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개혁작업의 부산물이라고 보는 것처럼 큰 오해도 드물 것이다.

이 국면을 고육지계 (苦肉之計) 로 삼아 개혁을 가속시키려는 책략을 쓰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잠재하고 있는 증상들, 즉 양파의 아직 감춰져 있을지도 모르는 켜로는 환란의 재습래 (再襲來)가 있다.

마이너스성장에 따라 수입수요가 줄어들면서 달러 값은 수출을 지탱하기 힘들 수준으로 떨어졌다.

산업활동의 가동률이 60% 이하로 떨어지면서 생산 단위당 고정 (固定) 비용은 약 두배로 커졌다.

고비용 구조가 더 악화된 것이다.

이런 고비용은 수출 경쟁력을 그만큼 떨어뜨린다.

수입축소 때문에 거뒀던 무역수지 흑자가 적자로 반전될 징조가 뚜렷해지고 해외에서 외평채 (外平債)가격이 급락하고 있는 것은 소름을 돋게 한다.

닥칠 수 있는 또 다른 증상으로 '질주 (galloping) 인플레이션' 도 있다.

이런 인플레이션이 오히려 하루속히 닥치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되면 기업의 채무는 하루 아침에 손 안 대고 인플레이션만큼 줄어든다.

은행이 떠안은 담보 자산은 값이 올라가고 예금 부채는 값이 줄어든다.

모든 손해는 예금자들이 다 떠맡게 된다.

더 나쁜 것은 인플레는 질주하는데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방향으로 치닫는 것이다.

일본경제는 관치경제.관치금융.경영불투명성 폐단 때문에 거품과 거품꺼지기, 그에 따른 대출 경색, 디플레이션성 경기위축을 일으키고 있다.

이 폐단은 우리나라에서는 일본보다 한층 더 심하기 때문에 그 결과인 경제위축은 일본보다 더 악화.확대돼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은 세계에서 제조업 생산성이 가장 높고 세계 제일의 무역흑자국 겸 대외 채권국가다.

그러나 우리는 제조업 경쟁력이 낮고 세계 유수의 대외채무국가다.

기왕에 있는 대외채무의 이자갚기가 어려워지면 원 - 달러 환율이 오르면서 질주 인플레이션이 몰아닥칠 수 있다.

8월말~9월초로 금융산업과 대기업 개혁작업은 마무리된다는 것이 정부의 일정표라고 한다.

9월부터는 강력한 정치개혁을 시작한다고 대통령은 선언했다.

노자 (老子) 는 조용한 반어 (反語) 로 '이름은 아무 것이라도 이름이다 (名可名)' 라고 속삭였지만 중요한 것은 매라는 이름이 아니라 꿩을 잡는 것이다.

현대자동차의 정리해고 계획이 사실상 실패함으로써 기업이 살아 있으면서 고용을 조정한다는 것은 한국에서는 불가능한 일임이 확정돼 가고 있다.

고비용 저효율을 치료하지 못하면 개혁은 독백적 수사학, 찰나적 포퓰리즘의 이름으로 사라질 것이다.

강위석(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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