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기’ 부작용이 신약의 운명을 바꿨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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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고개 숙인 남성들에게 신이 내린 선물, 20세기 최후의 위대한 발명품…. 먹는 형태로는 세계 최초의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성분명 실데나필)에 쏟아졌던 찬사들이다. 1998년 미국·유럽 등에서 처음 출시된 이래 지난 10년 동안 공식적으로만 전 세계 3500만 명의 남성이 복용했을 정도다. 비아그라는 그러나, 협심증 치료제로 개발됐던 약이다. 그런데 임상시험을 거치면서 나타난 부작용이 아예 약의 ‘운명’을 바꿔 버렸다. 이처럼 신약 개발에서 임상시험은 가장 핵심적인 과정이다. 임상시험의 진행방법과 역할을 비아그라의 개발과정을 통해 살펴봤다.

독성·부작용서 투여량까지 끝없는 점검
신약은 후보물질을 찾아내는 발굴단계와 독성 테스트 및 임상시험을 포함하는 개발단계를 거쳐 식품의약품안전청 등의 허가를 받아 출시된다. 여러 가지 화합물의 조합 가운데 약효를 내는 물질을 찾아내는 발굴단계도 모래사장에서 금가루를 찾는 것에 비유될 만큼 어렵지만, 개발단계는 동물 및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더욱 어려운 과정이다.

먼저 손에 쥐인 물질이 실제 생체 내에서 약효를 나타내는지, 독성을 띠지는 않는지 실험동물을 통해 살펴본다. 이를 전(前)임상시험이라고 한다. 비아그라의 경우 86년 후보물질 발굴이 시작돼 89년 개와 토끼 등 실험동물을 대상으로 실데나필의 전임상시험이 이뤄졌다. 이를 통해 실데나필의 안전성과 관상동맥 확장 효과가 확인됐다.
전임상 결과가 안전하고 유효한 것으로 나타나면 정부의 허가를 받아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 즉 임상시험 단계로 접어든다. 대개 1상부터 3상까지 세 단계로 나뉘어 진행되는 임상시험은 가장 많은 기간과 비용을 필요로 한다.

1상은 주로 건강한 지원자를 대상으로 약물에 대한 부작용은 없는지, 약물이 체내에 들어가 독성물질로 변하지는 않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핀다. 화이자는 91년 영국에서 실데나필을 1회 투여해 보는 초기 1상 시험에 이어, 25·50·75㎎ 세 가지 용량으로 하루 세 번 열흘간 투여하는 2차 1상 시험을 진행했다. 그런데 여기서 발기현상을 호소하는 피험자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연구팀은 실데나필의 작용 메커니즘상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으로 치부했다. 그래서 92년엔 8명의 협심증 환자를 대상으로 2상 시험에 들어갔다.

2상 시험은 환자를 대상으로, 단기 투약에 따른 부작용과 최적의 용량을 확인하는 단계다. 몸무게에 따라 어느 정도의 양을 처방해야 하는지, 약물로 또는 알약으로 투여할지 등을 결정짓는다.

실데나필의 경우 2상에서 운명이 갈렸다. 협심증 치료제로 소규모 2상 결과가 기대 이하로 나온 데 실망한 화이자는 발기부전 치료제로 연구 방향을 틀었다. 약물의 안전성을 확인하는 1상은 이미 통과한 셈이므로 93년 말 영국 브리스톨에서 곧장 소규모 2상에 들어갔다. 16명의 발기부전 환자를 대상으로 1주일간 이중맹검(double-blind), 위약대비(placebo-controlled), 그리고 교차시험(crossover trial)의 세 가지 조건 하에 진행됐다.

환자가 신약에 대해 지나친 기대감 또는 불안감을 갖는 등의 심리적인 영향을 배제하기 위해 피험자는 물론 의료진도 모르게(이중맹검) 진짜 약과 가짜 약(플라시보)을 두 개의 비교군이 교차로 사용해보도록 하는 것이다. 실데나필은 여기서 발기부전의 약효를 극명하게 보였고, 94년 12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진행된 2차 소규모 2상 시험에서는 하루 한 알의 복용량이 결정됐다.

그리고 94~97년 영국·노르웨이·프랑스·호주·캐나다·미국 등에서 4500명 이상의 발기부전 환자를 대상으로 21건의 대규모 2상과 3상 시험이 진행됐다. 3상 시험에서는 대규모 환자군을 통해 효능과 효과, 용법과 용량, 사용상 주의사항 등이 결정된다.

임상 비용 때문에 국산 신약 개발 어려워
비아그라는 98년 미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다. 후보물질 발굴에서 출시까지 12년 만의 결실이다. 대개 하나의 신약을 시장에 출시하기까지 10∼15년의 시간과 15억 달러(약 1조9000억원) 정도의 연구개발비가 들어간다. 특히 임상시험 단계의 투자비 비율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한국노바티스 임상의학부 최종태(가정의학 전문의) 상무는 “임상시험 중인 제품이라 해도 FDA의 승인까지 받을 확률은 낮아 투자 위험이 크다”며 “신약마다 경우가 다르지만 전임상시험부터 임상시험까지 전체 신약개발 비용의 60∼70%가 들어간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중소 제약사들은 중간에 대형 제약사에 물질을 팔아 넘기거나 대형 제약사와 전략적 제휴를 맺는다. 현재 식약청에 등록된 국내 신약 14종 중 하나인 LG생명과학의 퀴놀론계 항균제 ‘팩티브’도 임상시험 비용 때문에 결국 다국적 제약사와의 제휴를 통해 탄생했다.

팩티브는 국내 신약 가운데 최초로 미국 FDA의 신약 승인까지 받은 약품이다. 미 FDA의 신약 승인을 따내면 유럽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의 승인을 비교적 수월하게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선 미국에서 임상시험을 진행해야 했다. 국내외에서 진행된 전임상과 임상 1상 시험까지는 우수한 결과를 보이며 성공적이었다. 문제는 2상이었다. 엄청난 비용, 인프라와 경험 부족, 이에 따른 상품화 지연 또는 실패의 경우를 고려해야 했다.

결국 LG생명과학은 세계적인 제약사 GSK의 전신인 스미스클라인비참(SB)과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 40여 개국, 1500여 병원, 9000여 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대규모 임상시험을 진행했다. 그러나 99년 SB가 FDA에 신청한 신약 승인은 1년 만에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그러자 SB는 공동개발을 포기했다. 그동안 임상시험에 투입된 4500억원을 포함, 연구개발비만 5000여억원에 달했다. 그대로 물러설 수 없었던 LG생명과학은 새로운 파트너를 찾은 뒤 자료를 보완·조정, 2002년 10월 FDA에 재신청했다. 제출된 12년간의 연구 결과는 A4용지로 총 10만여 장에 달했다. 결국 2003년 4월 FDA의 승인이 떨어졌다.

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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