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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8월 그리고 50년]오늘의 시각-남북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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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대결은 길고 대화는 짧았다.

남북관계 50년의 성적표다.

통일정책의 기조는 국내 정치상황에 따라 간단없이 흔들려 왔다.

남북 공히 정권안보를 위해 통일문제를 이용했다는 혐의에서 벗어나기도 어려웠다.

50년대에는 서로 '빨갱이' 요 '미제 (美帝) 앞잡이' 요 하며 '철천지 원쑤' 처럼 지냈고 '북진통일' 과 '적화통일론' 이 맞부딪친 시기였다.

60년대 들어서면서 남한은 '선건설 후통일론' 을, 북한은 '연방제론' 과 '군사우선주의' 를 내세우며 경쟁했다.

서로가 흉금을 털어 놓기에는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너무도 컸다.

그런 가운데도 68년 청와대 기습사건, 울진.삼척사건이 잇따라 터져 긴장도는 최고조에 달했다.

팽팽한 긴장관계는 7.4남북공동성명으로 일순 해빙무드를 타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는 지속되지 못했다.

남북에는 오히려 유신체제와 수령체제가 각각 등장, 대결은 보다 구조화됐다.

비밀회담 방식은 성공만 하면 정치적 성과가 커 이후에도 계속됐다.

전두환 (全斗煥).노태우 (盧泰愚) 대통령 시절에는 정상회담 합의 직전까지 갔다가 미국의 '압력' 으로 좌절됐다.

무엇보다 국민적 합의가 부족했다.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은 정상회담까지 합의했으나 17일을 앞두고 김일성 주석이 사망, 이뤄지지 못했다.

이러한 물밑 접촉은 남한 경제력이 북한을 압도하고 북한이 사실상 현상유지 정책인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내놓았기에 가능했다.

그렇다고 북한이 무력적화통일 노선을 완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83년 아웅산 테러사건은 '일면 대화 일면 파괴' 의 이중성을 드러낸 사건. 85년 북한 수재물자 제공을 지렛대 삼아 남북은 적십자회담.경제회담.국회회담 예비접촉 등을 통해 잇따라 얼굴을 마주했다.

적십자회담은 85년 9월 남북예술단 상호방문과 이산가족 고향방문을 성사시키는 역사적인 일을 해냈다.

물밑에서 진행된 장세동 - 한시해, 장세동 - 김일성 비밀회담의 성과가 수면 위로 표출된 것이다.

'대결속의 대화' 에서 '대화' 쪽에 무게가 실리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노태우정부의 '북방정책' 과 맞물려 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케 했다.

북한도 89년 사회주의권 붕괴이후 뚜렷한 변화 조짐을 보였다.

남북대화를 위기극복의 돌파구로 상정, 평양 - 서울간 접촉의 폭과 깊이를 넓혀 나갔다.

그러나 남북한이 정경분리 원칙을 채택하지 않은 상황에서의 대화는 정치.군사적 이유로 언제든지 중지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김영삼정부는 93년 터진 북한핵사찰과 김일성조문파동으로 그나마 진전 온 남북관계를 최악의 상태로 몰아 버렸다.

이인모 송환, 쌀 15만t 지원 등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취했으나 인공기 게양사건 (95.6) , 잠수함침투사건 (96.9) 등 번번이 대결적 자세로 나온 북한에 냉정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그 결과 일관성을 잃고 우왕좌왕, 긴장을 높이고 국론분열을 심화시켰다.

한.미 공조체제의 붕괴가 우려되기도 했다.

남북관계에서 '이렇게 해서는 안된다' 는 것을 보여준 5년간이었다.

그래서 남북간에는 상호주의와 정경분리 원칙이 일관되게 적용돼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했다.

이런 점에서 김대중정부가 햇볕정책을 정책기조로 삼은 것은 당연한 결정이었다.

물론 확고한 안보가 전제돼야 한다.

햇볕정책의 구체물인 정경분리.상호주의 원칙도 역사적 경험과 여론의 산물이다.

긴 안목으로 보면 남북관계는 대결.대화가 교차하면서 한걸음씩 진전해 왔고 북한도 조금씩, 느리게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심과 정책의 일관성이다.

포용정책의 효과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건국50년 동안 누적돼 온 대결과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50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전현준 (全賢俊) <민족통일연구원 북한정치군사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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