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22명, 렌즈로 본 우리 시대의 아이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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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사진작가 조선희(38)씨는 아이스 링크 위에 혼자 선 김연아선수를 찍을 생각이었다. “얼음판 위에 덩그러니 올라서 있는 피겨 스케이터의 외로움을 찍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연아 선수가 시간이 없었다. 조씨는 “스튜디오를 통째로 뜯어” 김연아의 CF 촬영 현장으로 옮겼다. 친한 사이인 CF 촬영감독에게 “5분만 찍겠다”고 사정한 뒤 김연아를 카메라 앞에 세웠다. 우여곡절 끝에 나온 사진에서 김연아는 평소 입던 청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19살에 어울리는 미소를 띄고 있다. 조씨는 “스케이터로서의 김연아를 포기하고 19살의 소녀를 찍은 것”이라고 했다.

김연아씨 등 ‘한국 우먼 파워’ 22명의 사진 앞에 선 작가 조선희씨. “조용한 느낌의 사진들로 전시장을 채우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포토그래퍼 장덕화 제공]


각 분야에서 최고가 된 한국 여성 22명을 찍은 사진전 ‘위민 나우(Women Now)’에 이렇게 찍은 김연아 사진이 들어갔다. 22명 중 발레리나 강수진씨의 배경은 본의 아니게 엘리베이터가 됐다. 도무지 시간을 낼 수 없었던 강씨가 공연 리허설을 끝내고 황급히 엘리베이터에 타기 직전, 아름다운 표정이 담긴 컷이 나왔다. 나경원 국회의원은 촬영을 하기로 한 하루 전에 한나라당이 재보궐 선거에서 참패해 비상이 걸렸다. 모든 스태프들이 마음을 졸이는 순간이었다.

◆성공한 여성의 공통점=이처럼 대한민국의 ‘파워 우먼’ 22명을 찍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씨는 “사진 찍는 동안에는 아침마다 온몸이 쑤셨다. 어떤 사진을 찍을까, 밤새도록 그 생각만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가 22명의 마지막 칸에 자신을 넣고, 머리에 카메라를 수북이 얹어 자화상을 찍은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랑하는 일 생각으로 머리 속이 가득 찬 여성들의 치열함, 그것은 조선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안 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는 모델들=22인의 파워와 유명세만큼 힘든 촬영이었지만, 한가지가 조씨를 편안하게 했다. “그 어떤 모델도 ‘안 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 컨설팅 회사인 ‘베인 앤 컴퍼니’의 김연희 대표는 어깨가 뾰족이 솟은 수트를 보고 “너무 쑥스럽다”면서도 기꺼이 걸쳤고, 가수 인순이는 숏 팬츠를 입으며 행복해했다. “세월이 훑고간 흔적을 그 누구도 감추려 하지 않았고,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조씨가 근거리에서 잡은 22명의 초상이다.

조씨는 이렇게 찍은 사진의 판매 금액 중 40%를 아동 구호기구인 ‘세이브 더 칠드런’에 기부한다. 분쟁지역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가 이 돈으로 세워질 예정이다. 조씨는 기부의 동력으로 4살배기 아들을 꼽았다. 그는 “어머니가 된 후 많은 게 달라졌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좀 더 이해하는 쪽으로 바뀐 나를 발견한다”고 말했다. 이번 사진들에서도, 피사체의 새로운 면을 끌어내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온화함이 보인다.

김호정 기자

▶21일까지 서울 명동 에비뉴엘 롯데아트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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