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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률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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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이 땅에 전화가 개통된 건 1896년의 일이다. 궁중에 고종황제 전용의 전화기 3대를 놓고 정부 각 부처와 평양과 인천으로 연결했다. 고종이 친히 전화를 걸면 관리들은 의관을 바로 하고 큰절을 네 번 한 뒤 무릎을 꿇고 엎드려 옥음을 받들어야 했다. ‘네모반듯한 나무갑 위에 백통빛 쇠종 두 개가 얹힌’ (염상섭 소설 ‘전화’) 이 신통한 기계를 당시 사람들은 덕률풍(德律風)이라 불렀다. 중국어로 읽으면 ‘떨뤼펑’으로 발음되니, 아마도 텔레폰의 음차(音借)를 그대로 받아들인 듯하다.

덕률풍 덕을 본 사람은 백범 김구였다. 명성황후 시해에 분노한 21세 청년 백범은 일본군 장교를 타살(打殺)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인천 감옥에 갇혔다.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고종은 사형집행 직전에 인천 감리소로 전화를 걸어 감형을 지시했다. 인천 감리소에 전화가 가설된 뒤 사흘 후의 일이었으니, 혹시 전화 개통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백범은 이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지 모른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순종이 기거하던 창덕궁과 고종이 묻힌 홍릉(구리 금곡리) 사이에 덕률풍이 개설됐다. 고종의 3년상을 순종이 치르기 위해서였다. 순종이 아침마다 덕률풍 앞에서 곡을 하는 동안 능지기는 수화기를 봉분 앞에 갖다 대고 있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화상전화로 성묘를 대신하고 인터넷으로 차례를 모신 격이랄까.

고종이 사용했던 벽걸이 전화와 100회선 용량의 교환기는 스웨덴 기업 에릭슨 제품이었다. 1876년 설립된 에릭슨은 그 무렵 이미 글로벌 기업이 돼 있었다. 협소한 내수시장의 울타리를 넘어 유럽은 물론 남미와 중국에까지 전화기와 교환기를 판매했던 것이다.

100여 년 전 통신 불모지 한국에 전화를 놓아주던 바로 그 에릭슨이 이제는 한국에 1000명 규모의 연구개발센터를 설립한다고 밝혔다. 정부 추산으로는 투자금액이 2조원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에릭슨이 한국에 연구거점을 두는 데엔 다목적 포석이 있겠지만 한국의 기술력과 정보기술(IT) 인프라를 높이 산 결과임에는 틀림이 없다. 한국이 세계 IT산업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부상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100년 전의 외래 문물 덕률풍에 감탄하던 고종은 훗날 이런 날이 오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지난 한 세기, 우리가 이룬 성과에 대해 가끔은 긍지를 가져도 괜찮을 듯하다. 자만하지만 않는다면.  

예영준 정치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