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NLL 무력화 노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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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오후 1시12분. 백령도 근해에서 초계작전 중인 해군 고속정에 북한 경비정의 무전 송신이 들어왔다. 남북 함정 간의 핫라인을 통해서였다. "한라산 너이(넷), 한라산 너이. 귀측(해군 고속정)이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침로(항로)를 변경해 내려가라." 해군 고속정 2척은 서해 북방한계선(NLL) 부근에서 활동 중인 북한 함정과 어선을 감시 중이었다. 해군 고속정의 위치는 정확히 NLL 남쪽의 우리 해역이었다. 해군 고속정은 바로 응신했다. "우리(남측)는 우리 역내에서 정상 경비 중이다. 우리 위치를 재확인하라."

이보다 다섯시간여 전인 오전 8시30분. 북한은 우리 해군의 송신에 응답하지 않았다. 당시 백령도 동쪽 9.2㎞ 해상에서 북한 어선으로 보이는 배 2척이 NLL을 침범했다. 해군은 함정 간 핫라인을 통해 퇴각을 요구하는 경고를 세차례 송신했다. 그러나 북한 경비정은 묵묵부답이었다.

핫라인이 서해상의 우발 충돌 방지를 위한 '교신'기능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북한이 자기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임의적 송신 수단에 불과한 실정이다. 북한이 핫라인을 NLL을 무력화하는 데 이용하려 하기 때문이라는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나아가 북한이 1999년 독자 설정한 해상경계선을 공식화하는 데 핫라인이 악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서해 함정 간 핫라인은 지난달 4일 제2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에서 합의됐다. 우리 정부는 이 합의를 남북 간 첫 군사적인 신뢰구축조치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핫라인 합의 이후에만 NLL을 네번 침범했다. 올 들어 핫라인 합의 이전까진 두번 침범했다. 지난해엔 경비정 침범 5회를 포함해 모두 20회였다.

우리 정부는 핫라인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많은 것을 양보했다. 휴전선 지역에 수백억원을 들여 설치한 대형 전광판과 확성기 등 선전물을 8월 15일까지 모두 제거키로 한 것이다. 군내에서 '들어주어서는 안 되는 무리한 요구'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북한의 주문을 들어주었다. 정부는 북한이 합의서에 서명하는 대가로 쌀 40만t도 제공하기로 했다.

그러나 정작 남북 간 합의서의 핵심부분인 핫라인 운영(2조)에서는 충돌을 방지할 해상을 'NLL 부근'으로 명기하지 않았다. 대신 '서해상'이라는 모호한 표현을 사용했다. 북한이 'NLL'이란 용어 사용을 끝까지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서해상에서 남북 함정 간 핫라인은 그 운영 기준을 놓고 남북이 각각 달리 해석할 수 있는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남측은 한국전쟁 이후 실질적인 남북 해상경계선이 돼온 NLL을 기준으로 삼고 있다. NLL 남쪽 해상이 우리 해역이다. 반면 북측은 해상 군사분계선이란 이름으로 한강 하구에 자기측 수역을 설정하고 있다. 북측 해상분계선의 북쪽 해역에는 연평도와 백령도 부근까지 포함된다.

북한의 해상분계선대로라면 연평도 등 서해 5도는 북한 통제구역이다. 우리가 NLL을 사수해야 하는 이유다. 동시에 북한으로선 핫라인 설치 이후 부쩍 NLL을 침범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북한 입장에선 핫라인을 통해 자신들의 해상경계선을 공식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핫라인은 우리 측 기대만큼 남북 간 긴장 완화라는 정신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서해상의 잦은 충돌과 탈북자들의 집단 한국 입국은 남북한 사이의 대부분 회담을 중단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당장 북한은 다음달 3일부터 서울에서 열릴 제15차 남북 장관급회담에 응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 19일 예정됐던 남북 군사실무회담에도 일방적으로 불참했다.

김민석 군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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