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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융타이 침 튀는 열변 속, 장제스는 제갈량을 봤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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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난창행영 시절인 1934년 10월 21일 장제스 부부(오른쪽에서 첫째·둘째), 장쉐량(가운데)과 함께 무릉(茂陵)에 놀러 나간 양융타이(왼쪽에서 둘째). 김명호 제공

양융타이(楊永泰)는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난세이다 보니 쓸모가 없었다. 서구 정치사상에도 한때 심취했지만 현실과는 동떨어진 소리투성이였다. 쑨원을 지지한 적도 있었다. 보면 볼수록 실속 없는 사람이었다. 국회의원도 해보고, 군벌들 덕에 성장(省長) 노릇도 해봤지만 결국은 쫓겨나 상하이로 도망 나왔다. 되는 일이 없다 보니 칩거하는 것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1927년 군사정변에 성공한 장제스가 난징에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양융타이는 소금장수의 유복자인 이 젊은 장군에게 의지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없는 돈에 호텔 스위트룸 한 칸을 임대했다. 고관들을 초청해 먹고 마셨다. 돈도 찔러 주었다. 싫다는 사람이 없었다. 장제스의 생각과 습관을 알아내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은 없었다. 왕양명(王陽明)의 학설에 심취하고 증국번(曾國藩)의 가서(家書)를 즐겨 읽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왕양명집(王陽明集)』과 『증문정공전집(曾文正公全集)』을 구입해 방 속에 틀어박혔다.

장제스의 사관학교 동기생 황푸(黃부)가 상하이 시장으로 부임했다. 황의 눈에 비친 양융타이는 천하의 기재였다. 장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양융타이는 장제스가 싫어하는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었다. 복장이 깔끔하지 못했고 앉는 자세가 단정치 못했다. 세수도 제대로 한 몰골이 아니었고 지독한 근시에 입 안에는 침이 가득했다. 그러나 튀어나오는 말들은 마른 하늘을 가르는 뇌성벽력과 다를 바 없었다. 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만면에 침 세례를 받은 것만 빼놓고는 유비가 제갈량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분을 만끽했다. ‘당대의 와룡선생’이라며 흥분했다.

장제스는 양융타이의 모략을 실천에 옮겼다. 2년여 만에 제후나 다름없었던 지방 군벌들을 완전히 제압했다. 자신의 백일몽을 현실로 만들어준 양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일쑤였다. 남은 것은 장시(江西)성 일대의 홍군(紅軍)밖에 없었다. 중국 땅 한구석에 들어와 있는 일본군은 다음 문제였다. 양이 제시한 양외필선안내(攘外必先安內:외세를 쫓아내려면 반드시 내부를 먼저 안정시켜야 한다) 정책도 그대로 수용했다.

장제스는 세 차례에 걸쳐 중공 근거지 섬멸작전을 펼쳤지만 5만 명에 불과한 홍군에게 연전연패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네 번째 섬멸작전을 지휘할 때 양융타이를 요직에 기용했다. 양은 패배 원인을 분석했다. 홍군은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무공작도 효과가 없었다. 은혜를 베풀어도 시큰둥했다. 수십만 대군의 위엄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 홍군을 북양군벌의 군대 정도로 여긴 게 장제스의 실책이었다. 특단의 책략이 필요했다. 만언서(萬言書)를 작성해 장에게 전달했다. “삼분군사(三分軍事) 칠분정치(七分政治)”가 주 내용이었다. 제갈량의 출사표를 능가하는 천하의 명문을 접한 장은 군사력에만 의존해온 그간의 정책이 실책임을 통감했다. 제4차 섬멸 작전도 패배했지만 동요하지 않고 친정(親征)에 나설 채비를 차렸다. 난창(南昌)에 군사위원회 위원장 행영(行營)을 설치하고 50만 대군을 동원했다.

난창행영의 유일한 설립 목적은 제5차 홍군섬멸작전이었다. 조직도 간단했다. 군사청과 정치청이 전부였다. 그러나 장제스가 버티고 있는 한 전국의 인사권과 행정권을 장악한 중국 최고의 권력기관이었다. 양융타이는 행영의 비서장 겸 정치청장 임명장을 받았다. 2개월간 열린 전국 고급행정인원 회의에서 정치청은 행정원의 역할을 했다. 양융타이는 말이 청장일 뿐 실질적인 행정원 총리였다.

제5차 홍군섬멸작전은 종래의 것들과 성질이 달랐다. 군사 부문의 비중은 30%에 불과했다. 양융타이는 통신사를 설립해 전황에 관한 뉴스를 독점했고 극단과 예술단을 조직해 농촌을 다니며 민심을 다독거렸다. 보갑조직을 강화하고 연좌제를 실시해 소비에트 지역의 민중들을 홍군으로부터 격리시킨 후 엄격한 경제봉쇄정책을 강행했다. 군대와 행정관료, 지역 토호들 사이에 비상연락망도 구축했다.

정치전과 경제전을 곁들인 입체적인 공격은 홍군을 고사 직전까지 몰고 갔다. 근거지를 버리고 퇴각했다. ‘장정(長征)’이라는 멋진 용어를 생각해낼 겨를도 없었다. 중국공산당에게 양융타이는 참으로 버거운 상대였다.

양융타이는 제갈량과 방통을 합쳐놓은 것 같은 인물이었지만 1936년 가을 국민당의 다른 계파가 고용한 자객의 손에 암살당했다. “꼭 이럴 줄 알았다”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자신이 한 일에 비해 과대 포장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잊혀진 인물도 허다하다. 양융타이는 역사 속에 잠복해 있지만 붉은 기운이 퇴색하면 서서히 모습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글쓴이 :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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