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살앓는 일본경제]상.고조되는 위기와 불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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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아시아 금융위기가 진정되지 않는 가운데 러시아.중국.브라질쪽에 이상기류가 흐르게 되자 일본열도를 쳐다보는 지구촌의 시선이 따갑기만 하다.

세계 최강의 제조업 경쟁력을 자랑하던 일본은 지금 경기침체.엔화약세로 인해 '세계경제의 문제아' 로 전락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경제는 숫자로 나타나는 환율.주가와 각종 통계로만 가늠하기에는 힘든 중병을 앓고 있다.

중산층 몰락과 지방경제 붕괴에다 정부 불신감이 팽배해 있다.

잇따른 경기부양책과 금융시스템 안정대책으로도 위기가 진정되지 않는 일본경제의 실상과 미국.유럽 자본의 공세를 3회에 걸쳐 살펴본다.

편집자

일본열도 최후의 낙원인 홋카이도 (北海道) . 경치가 빼어난 아시베쓰 (芦別) 시에 주민들이 공동투자해 건설한 '캐나디안 월드' .캐나다 전원마을의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았지만 건물 창문마다 비닐로 간신히 비를 가릴 뿐 폐허로 변했다.

"빚 갚는 데만 20년 이상 걸립니다."

하야시 마사시 (林政志) 시장의 말이다.

지난 90년 개장한 이 테마파크는 50억엔 (약 4백50억원) 의 부채를 안고 지난해 10월 결국 쓰러졌다.

여기에 투자한 주민들도 깡통을 찼다.

가구당 평균 8백만엔이 넘는 빚에 못 이겨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로 시 (市) 인구가 감소할 정도다.

홋카이도 경제의 공공투자 비중은 전국 평균 (6%) 의 두배 가까운 11.2%.뜨거웠던 개발열풍만큼 장기불황은 홋카이도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지난해 9백28개 업체가 도산해 부도금액이 96년 대비 6배 증가한 1조9백억엔에 이르렀다.

일본은행 오시바 요시로 (大芝芳郎) 삿포로지점장은 "이 지역 최대은행인 홋카이도 다쿠쇼쿠 (拓殖) 은행이 견디지 못하고 결국 도산했다" 고 그 심각성을 전했다.

도쿄에서 한발짝만 벗어나면 엔화 약세나 도쿄 (東京) 증시의 주가폭락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심각한 불황의 단면들과 쉽게 부닥친다.

도쿄권 위성도시인 고가네이 (小金井) 시. 시 정부는 올해초 명예퇴직자들의 퇴직금을 지급하지 못해 7억엔의 지방채를 발행해 가까스로 막았다.

거품경제 시절 청소.가로정비 등을 직영사업으로 끌어안았다가 시 재정이 거덜났기 때문이다.

"국민은 가난해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부자" 라는 일본의 마지막 자존심조차 무너진 것이다. 전후 (戰後) 23년 만의 첫 마이너스 경제성장률, 생활고를 비관한 자살자 3천5백명 (90년 대비 2.8배 증가) , 올해 상반기 도산건수 1만1백건 (사상 최고)….

각종 통계도 일본경제가 처한 심각성을 말해 주고 있다.

일본정부는 일단 금융시스템 안정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올해초 재정자금 1천3백억엔을 지원했던 장기신용은행은 미국 무디스로부터 오히려 '투기적 (투자부적격)' 신용등급 판정을 받았다.

홋카이도 다쿠쇼쿠 은행이 담보로 잡았던 삿포로역사 (驛舍) 주변의 테르메 인터내셔널 빌딩은 공사비 (2백65억엔) 의 20%도 안되는 40억엔에 대만재벌 창룽 (長榮) 그룹에 팔릴 운명이다.

전국 곳곳에 이처럼 자산을 처분해도 도저히 부채를 갚을 수 없는 기업들이 널려 있다.

도쿄의 증권가인 가부토초에는 "설사 금융위기를 수습해도 종합건설업체들의 연쇄도산이 기다리고 있다" 는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다.

일본정부의 대책도 '밑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이뤄지고 있다.

대장성은 홋카이도 다쿠쇼쿠 은행을 덩치가 5분의1에 불과한 호쿠요 (北洋) 은행에 넘기면서 4백억엔의 재정자금을 투입했다.

그래도 자기자본이 부족하자 다시 일본생명 등 주요 금융기관에 4백억엔의 긴급자금을 지원하도록 요청했다.

오부치 게이조 (小淵惠三) 총리는 국회에서 "16조엔어치의 경기부양책과 재정자금 30조엔을 투입한 가교 (架橋) 은행만 설립되면 경제회생이 가능하다" 고 밝혔지만 수긍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지난 6년간 70조엔을 투입해도 경기부양에 실패했는데 16조엔으로 살릴 수 있을지 의심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일본은행이 통화공급량을 9%나 늘렸음에도 대출은 줄어들고 장롱예금만 늘어나는 것이나 감세 (減稅) 발표에도 불구하고 소비가 오히려 뒷걸음질치는 것도 이런 불신감에서 출발하고 있다.

도쿄 = 이철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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