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국회의 헌법 논의로 민주정치 숨통 트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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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증상을 대다수 국민이 심각하게 느끼고 있지만, 그 원인과 치유 방안에 대하여는 이념적 위치와 정치적 입지에 따라 저마다 생각이 다르다. 전혀 입장을 달리하는 국민 간 분열이 날로 심화되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모두가 “네 탓이오”만을 외치고 있기에 나라의 운명은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헌법이 없는 민주주의’도 가능하다는 허상에 사로잡힌 듯 나라의 기본인 헌법을 망각지대에 남겨둔 채 일상적인 갈등만을 부추겨 왔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집단적 책임 회피를 더 이상 방임할 수 없다. 어려운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의 방침이라고 한다. 따라서 한국 민주주의의 기본 틀을 온 국민이 다시 생각하고 논의하는 공식적인 헌법 논의가 하루속히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마침 제헌절을 맞는 이달에 헌법 논의가 활성화되는 흐름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우리 헌정사의 어려운 고비마다 헌법 논의를 선도하여 온 대화문화아카데미(구 크리스찬 아카데미)는 3년에 걸쳐 100여 명의 전문가들이 참여한 헌법 심의를 통해 마련한 헌법 개정안을 발표하게 되었다. 국회의장이 위촉한 헌법연구자문위원회도 개헌에 관한 보고서를 곧 제출한다고 한다.

한편, 18대 국회 개원 직후 186명 의원들의 초당적인 참여로 출발한 미래한국헌법연구회도 각 당 지도부의 미온적인 자세로 인한 그간의 부진을 씻고 다시 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숨 막히게 침체된 한국 정치의 마비상태를 타개할 최선의 길은 결국 대한민국의 기본 가치와 규범, 그리고 민주정치 운영의 원칙과 규칙을 재정리하는 헌법 논의에 있다는 데 국민적 공감대와 지혜가 모아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오는 9월 정기국회가 개회되는 대로 헌법특위가 구성되어 활동에 들어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정치의, 특히 국회의 중심적 위치를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헌법특위의 출범은 여야가 단숨에 합의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진다. 그리하여 국회가 주관하는 공청회에서 각계각층 여러 단체의 대표들이 한국 정치에 대한 비판과 개선 방안을 헌법적 차원에서 제시하고 의원들의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책임 있게 국정에 참여하는 기회를 제공하여야 한다.

헌법특위 공청회가 상당 기간을 소요하더라도 국민들의 다양한 입장과 이익이 개진돼 기록에도 남도록 배려하는 것이 참여민주주의의 원칙을 살리고 정치적 소외를 줄이는 적절한 방법임을 이해해야 한다.

이미 국민들 사이에선 헌법 개정에 관한 많은 의견이 표출되고 있다. 극심한 변화를 경험하여 온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국민의 기본권도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생명권, 환경권, 여성의 평등권, 저항권 등이 시민사회의 관점에서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균형 있게 유지해야 한다는 경제 조항도 당면한 경제위기 속에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는 입장도 있다. 지방자치, 지방분권, 지역주의의 문제를 한데 묶어 국가의 조직 형태를 획기적으로 바꿔보자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국민들의 관심이 가장 집중되고 있는 것은 역시 정부 형태와 권력구조의 문제다. 한편으로는 책임을 질 수 없는 집중된 권력을 행사하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단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집단적 의사결정보다는 강력한 지도자의 결단에 의존하고 싶어 하는 모순된 국민 정서를 이쯤에서 스스로 정리할 시점에 도달하였음을 대다수 국민은 실감하고 있다. 국민을 대표하고 국민에게 책임질 수 있는 의회가 정치의 중심에서 작동할 때 민주정치가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것은 이미 세계적으로 증명되었다.

우리 국민이 굳이 한국적 예외성을 고집할 만큼 편협하지는 않다고 본다. 그러기에 국민의 뜻과 지혜를 모아서 헌법 논의를 시작하는 것은 국회의 시대적 사명이며 국회의 권위와 위상을 정립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고문